파란만장(波瀾萬丈). 인생에 굴곡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사를 듣는 것만으로 한 편의 명작 드라마와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 세상 한파에 뜨거운 눈물 짓기도 하지만, 끝내 좌절을 이겨내고 ‘찬란한 해피엔딩’을 꽃피운다.
새터민 한의사 김지은(43·여) 씨는 그렇듯 드라마틱한 인생을 그려가고 있다. 그는 북한의 촉망받는 한의사에서 중국의 파출부, 남한의 만학도를 거쳐 이제 ‘남북한 통합 한의사’로 거듭났다.
고려의사→파출부→남북 통합 한의사
김지은 씨는 북한에서 유능한 엘리트였다. 그는 1988년 12월 함경북도 청진시 청진의학대학 고려의학부 7년 과정을 마친 뒤 청진시 구역병원 고려의사(북한에서 한의사를 부르는 말)로 8년간 임상경험을 쌓았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라는 버젓한 직업을 가졌지만 북한이라는 울타리는 그에게 좁았다. 그는 탈북의 동기로 ‘경제적 어려움’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을 꼽았다.
“북한에서는 의사가 한국처럼 고수익을 얻는 직업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병원을 차리고 돈을 벌 수 없으니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여느 주민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북한의 의료체계는 ‘무상치료제’와 ‘의사 담당 구역제’로 대표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경비를 국가가 부담하고, 의사들은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자신이 담당한 구역에 나가서 위생보건, 예방접종, 건강검진 등을 수행한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주민의 급료에서 일정액을 사회보장비와 치료비 명목으로 공제한다. 의사 담당 구역제 역시 경제난으로 의료체계 전반이 붕괴되면서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1999년 3월 중국으로 탈북한 뒤 2002년 한국으로 입국할 때까지 3년을 중국에서 지냈다. 파출부에서부터 도시락 판매원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때의 고생이 떠올랐는지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당장은 조국을 떠나지만 평생 떠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들어오려 했습니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한 중국의 실상을 보고는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남조선이 조국보다 잘산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과연 나는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한국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은 매일처럼 데모가 벌어지는 무서운 나라’라는 막연한 인식이 있을 뿐, 그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의 ‘한국 알기’ 교재는 한국의 신문, 잡지, 영화. ‘닥치는 대로’ 한국 신문과 잡지를 읽고 영화를 봤다. 특히 ‘동아일보’와 ‘신동아’는 그가 한국을 접하는 주요 창구였다.
“2002년 1월 검찰총장이 동생의 비리와 관련해 사퇴했다는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도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어느 여고생이 일본을 미화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죠. 어린 소녀가 뭘 알고 그런 말을 했을까 싶었는데, 주변에 계신 분들이 ‘한국에는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순탄치 않았다. 북한에서처럼 한의사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학제와 전문자격 취득 과정이 다른 한국에서 북한에서의 경험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통일부와 교육부로부터는 한국 한의대에서 6년을 졸업한 것과 같은 학력 인정을 받았지만, 보건복지부는 졸업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한의사 국가고시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북한에 가서 한의사 경력을 입증할 수 있는 증명서를 가져오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이렇게 된 거, 남한의 한의학을 제대로 배워보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2005년 세명대 한의대 본과 1학년에 편입해 어린 친구들과 4년간 공부했지요.”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해 도전”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그의 별명은 ‘모릅니다’였다. 북한에서 7년 과정을 공부했고 8년의 임상경험도 있었지만 그는 철저히 새내기의 자세로 다시 배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지은 씨, 이게 맞을까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 학생에 불과합니다.”
남북한 간 한의학의 괴리도 그를 괴롭히기 일쑤였다. 남북한의 한의학은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북한에서는 한의학을 ‘고려의학’으로, 현대서양의학을 ‘신의학’으로 부른다.
북한은 ‘한의학(漢醫學)’이라는 용어가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1960년대부터 ‘동의학(東醫學)’으로 바꿔 부르다 93년 이후에는 ‘고려의학’으로 개칭했다. 그 결과 동의사는 ‘고려의사’로, 동의요법은 ‘고려치료법’으로, 동약은 ‘고려약’으로, 동의병원은 ‘고려병원’으로, 대학의 동의학부는 ‘고려의학부’로, 동의과는 ‘고려치료과’로 개칭됐다.
북한에서 한의학을 ‘동의학’으로 바꿔 부른 것은 허준이 ‘동의보감’ 서문에서 중국의 의학적 특징을 북의와 남의로 나눈 뒤 우리의 전통의학을 ‘동의’라 부르자고 주장한 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고려의학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봉한학설’을 발표한 평양의학대학 김봉한 교수는 한때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신동아 2006년 2월호 ‘북한판 황우석 김봉한의 영광과 몰락’ 기사 참조).
“김봉한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이 지나가는 얘기로 그분의 학설에 대해 간단히 얘기는 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이 정치적으로 숙청된 데다,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죠. 북한의 사회체제가 워낙 폐쇄적이라 드러내놓고 논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김씨는 졸업과 함께 지난 1월 제64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생애 두 번째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공식적인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가 된 것. 이제 그는 한의원 원장으로 변신해 자본주의 사회의 의료경영인으로서 또 한 번 쉽지 않은 도전을 앞두고 있다.
지난 5월 말 개원했는데, 환자를 진심으로 돌보겠다는 뜻으로 ‘지은’이라는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진(眞)’자를 써서 병원 이름은 ‘진한의원’으로 정했다. 하루 20명 정도의 환자가 찾아와 일단 연착륙에 성공했다. 남북한 한의학을 접목해보자는 의도에서 ‘남북한한의학연구소’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북한의 고려의학은 질병치료 중심인 데 비해 남한의 한의학은 건강관리 위주로 보는 분들이 많더군요. 북한에서는 고려의학과 신의학을 병행 발전시킨다는 원칙에 입각, 한의원에서 중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선 중환자는 당연히 양방에서 치료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한의학은 보약이나 다이어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하지만 고려의학과 한의학 모두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을 기반으로 합니다.”
마부위침(磨斧爲針).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겠다는 열성과 노력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한의사가 되겠다”는 김지은 한의사의 새로운 도전이 기대된다.
새터민 한의사 김지은(43·여) 씨는 그렇듯 드라마틱한 인생을 그려가고 있다. 그는 북한의 촉망받는 한의사에서 중국의 파출부, 남한의 만학도를 거쳐 이제 ‘남북한 통합 한의사’로 거듭났다.
고려의사→파출부→남북 통합 한의사
김지은 씨는 북한에서 유능한 엘리트였다. 그는 1988년 12월 함경북도 청진시 청진의학대학 고려의학부 7년 과정을 마친 뒤 청진시 구역병원 고려의사(북한에서 한의사를 부르는 말)로 8년간 임상경험을 쌓았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라는 버젓한 직업을 가졌지만 북한이라는 울타리는 그에게 좁았다. 그는 탈북의 동기로 ‘경제적 어려움’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을 꼽았다.
“북한에서는 의사가 한국처럼 고수익을 얻는 직업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병원을 차리고 돈을 벌 수 없으니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여느 주민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북한의 의료체계는 ‘무상치료제’와 ‘의사 담당 구역제’로 대표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경비를 국가가 부담하고, 의사들은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자신이 담당한 구역에 나가서 위생보건, 예방접종, 건강검진 등을 수행한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과는 달리 주민의 급료에서 일정액을 사회보장비와 치료비 명목으로 공제한다. 의사 담당 구역제 역시 경제난으로 의료체계 전반이 붕괴되면서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1999년 3월 중국으로 탈북한 뒤 2002년 한국으로 입국할 때까지 3년을 중국에서 지냈다. 파출부에서부터 도시락 판매원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때의 고생이 떠올랐는지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당장은 조국을 떠나지만 평생 떠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나가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들어오려 했습니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한 중국의 실상을 보고는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남조선이 조국보다 잘산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과연 나는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한국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은 매일처럼 데모가 벌어지는 무서운 나라’라는 막연한 인식이 있을 뿐, 그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의 ‘한국 알기’ 교재는 한국의 신문, 잡지, 영화. ‘닥치는 대로’ 한국 신문과 잡지를 읽고 영화를 봤다. 특히 ‘동아일보’와 ‘신동아’는 그가 한국을 접하는 주요 창구였다.
“2002년 1월 검찰총장이 동생의 비리와 관련해 사퇴했다는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도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어느 여고생이 일본을 미화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죠. 어린 소녀가 뭘 알고 그런 말을 했을까 싶었는데, 주변에 계신 분들이 ‘한국에는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순탄치 않았다. 북한에서처럼 한의사의 길을 가고 싶었지만, 학제와 전문자격 취득 과정이 다른 한국에서 북한에서의 경험을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통일부와 교육부로부터는 한국 한의대에서 6년을 졸업한 것과 같은 학력 인정을 받았지만, 보건복지부는 졸업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한의사 국가고시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북한에 가서 한의사 경력을 입증할 수 있는 증명서를 가져오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이렇게 된 거, 남한의 한의학을 제대로 배워보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2005년 세명대 한의대 본과 1학년에 편입해 어린 친구들과 4년간 공부했지요.”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해 도전”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그의 별명은 ‘모릅니다’였다. 북한에서 7년 과정을 공부했고 8년의 임상경험도 있었지만 그는 철저히 새내기의 자세로 다시 배우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지은 씨, 이게 맞을까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게 맞습니다. 저는 잘 모르는 학생에 불과합니다.”
남북한 간 한의학의 괴리도 그를 괴롭히기 일쑤였다. 남북한의 한의학은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북한에서는 한의학을 ‘고려의학’으로, 현대서양의학을 ‘신의학’으로 부른다.
북한은 ‘한의학(漢醫學)’이라는 용어가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1960년대부터 ‘동의학(東醫學)’으로 바꿔 부르다 93년 이후에는 ‘고려의학’으로 개칭했다. 그 결과 동의사는 ‘고려의사’로, 동의요법은 ‘고려치료법’으로, 동약은 ‘고려약’으로, 동의병원은 ‘고려병원’으로, 대학의 동의학부는 ‘고려의학부’로, 동의과는 ‘고려치료과’로 개칭됐다.
북한에서 한의학을 ‘동의학’으로 바꿔 부른 것은 허준이 ‘동의보감’ 서문에서 중국의 의학적 특징을 북의와 남의로 나눈 뒤 우리의 전통의학을 ‘동의’라 부르자고 주장한 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의 고려의학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봉한학설’을 발표한 평양의학대학 김봉한 교수는 한때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신동아 2006년 2월호 ‘북한판 황우석 김봉한의 영광과 몰락’ 기사 참조).
“김봉한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이 지나가는 얘기로 그분의 학설에 대해 간단히 얘기는 하셨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이 정치적으로 숙청된 데다,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죠. 북한의 사회체제가 워낙 폐쇄적이라 드러내놓고 논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김씨는 졸업과 함께 지난 1월 제64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해 생애 두 번째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공식적인 남북한 통합 한의사 1호가 된 것. 이제 그는 한의원 원장으로 변신해 자본주의 사회의 의료경영인으로서 또 한 번 쉽지 않은 도전을 앞두고 있다.
지난 5월 말 개원했는데, 환자를 진심으로 돌보겠다는 뜻으로 ‘지은’이라는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진(眞)’자를 써서 병원 이름은 ‘진한의원’으로 정했다. 하루 20명 정도의 환자가 찾아와 일단 연착륙에 성공했다. 남북한 한의학을 접목해보자는 의도에서 ‘남북한한의학연구소’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북한의 고려의학은 질병치료 중심인 데 비해 남한의 한의학은 건강관리 위주로 보는 분들이 많더군요. 북한에서는 고려의학과 신의학을 병행 발전시킨다는 원칙에 입각, 한의원에서 중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선 중환자는 당연히 양방에서 치료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한의학은 보약이나 다이어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하지만 고려의학과 한의학 모두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을 기반으로 합니다.”
마부위침(磨斧爲針).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겠다는 열성과 노력이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한의사가 되겠다”는 김지은 한의사의 새로운 도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