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시대가 저물면서 대륙의 패권을 둘러싸고 벌인 격돌에서 유방(왼쪽)은 줄곧 항우에게 쫓기는 형세였지만 결국 패권을 움켜쥐었다.
하나같이 천하를 걸고 다투는 최대의 모험이자 비장미가 감도는 최후의 결전을 뜻한다. 건곤일척은 성당(盛唐)의 시인 한유(韓愈·768∼824)가 쓴 ‘홍구(鴻溝)를 지나며’에 나오는 ‘誰勸君王回馬首眞成乾坤一擲(누가 군왕의 말머리 돌릴 것을 권하여 실로 일척에 건곤을 내걸게 했는고)’라는 시구에서 유래했다.
진(秦)나라가 망하고 천하가 분열되자 초(楚)나라의 항우(項羽·기원전 232∼202)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기원전 256∼195)은 홍구(하남성 가노하 지방)를 경계선으로 양분됐다. 처음에는 항우가 패권을 잡고 초패왕(楚覇王)을 자처해 천하가 그에게 돌아갈 것 같았으나, 의제(義帝) 시해와 불공정한 논공행상으로 천하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혼란기에 유방은 일약 거대한 세력으로 항우와 맞서게 됐다. 그 후 항우가 가장 두려워한 인물은 유방이요, 유방 또한 자신과 결판을 보게 될 최후의 적은 항우라고 생각했다.
항우와 폼페이우스 제거한 유방과 카이사르
원래 유방이 항우에게 감정을 품게 된 이면에는 연유가 있다. 다 같은 의제의 신하로서 최초로 관중(關中·섬서성 위수평원) 땅을 평정하는 사람을 관중왕으로 봉하겠다는 임금의 공약을 항우가 무시해버린 까닭이었다. 유방은 천신만고 끝에 관중을 항우보다 한 걸음 앞서 정복했지만, 항우는 의제를 농락해 유방을 멀리 파촉(巴蜀)의 이역으로 쫓아버렸다.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던 유방은 관중 일대를 수중에 넣고 나서 우선 항우에게 ‘다른 야심은 없노라’는 거짓 기별을 띄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사력을 키우면서 언제든지 관외(關外)로 진격해나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듬해 봄 항우는 제(齊)나라와 소득 없이 되풀이되는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를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유방은 먼저 항우에게 참시(斬屍)당한 초나라 의제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다.
죽은 임금을 위한 조상(弔喪)과 더불어 역적 항우를 응징, 토벌할 것을 여러 지방의 왕후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56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초나라로 진격해 들어가 그길로 수도 팽성(彭城·강소성 서주)을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항우는 전군을 철수시킨 뒤 팽성으로 달려가 유방의 진영을 겹겹이 포위하고 전력을 다해 강타했다. 유방의 원정군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무너지는 수밖에 없었다.
유방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영양(榮陽·하남성 영양현)에 이르렀다. 돌아보니 그의 부친과 아내는 적중에 내버려둔 채였다. 영양에서 다소간 군세를 가다듬어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항우의 추격군에게 포위돼 여기서도 참패를 거듭했다.
그 후 유방은 명장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평정하면서 겨우 세력을 늘렸다. 항우 세력이 점차 약화되자 항우는 드디어 유방에게 협상을 청했다. 이 협상에서 천하를 갈라 홍구로부터 서쪽을 한나라로 하고 동쪽을 초나라로 할 것과 유방의 부친과 아내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결국 유방도 승낙한 ‘천하 양분’인 것이었다.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유방도 회군할 채비를 하려 했다. 이때 유방의 참모 장량(張良)과 진평(陣平)이 “한나라는 천하의 절반을 차지해 모든 제후도 따르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초나라를 멸망케 하려는 징조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차제에 초를 토멸해야 합니다.
이 같은 기회를 지나친다면 호랑이를 키웠다가 후환을 남기는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고 진언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유방은 초군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했다. 이듬해에는 한신 등의 군사와 더불어 항우를 해하(垓下·안휘성 영벽현)로 몰아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항우를 오강(烏江·안휘성 화현)에서 자살케 하고 결국 천하를 휘어잡았다. 유방은 파천황(破天荒)을 이뤄 한나라 고조 황제로 즉위했다(기원전 202년).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총독의 지위와 그 지휘 아래 있는 군대까지 박탈하려 한 것. 이에 카이사르는 먼저 화해를 제의했으나 거절당하자 마침내 마지막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로마로 돌아갔다가는 무장한 적에게 에워싸여 법정으로 끌려갈 것이 분명했기에 로마와 가까운 라벤나로 와서 태연한 모습으로 무술연습장 건축현장을 시찰하며 연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자 몰래 그곳을 빠져나온 뒤 샛길로 달려가 5000명가량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와의 경계인 루비콘 강에 다다랐다. 그때 그는 “아직은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저 조그만 다리를 넘어서면 모든 것을 무기의 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라며 머뭇거렸는데, 갑자기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 진군의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하늘을 우러러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라고 외쳤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폼페이우스 일당은 해외로 도망쳤고 후에 파르살루스의 결전에서 궤멸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공략하고 시리아에서 소아시아의 폰투스 지방으로 쳐들어갔다. 격전 끝에 그곳 왕으로 하여금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했다.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이 유명한 말이 그때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내란이 평정되고 그가 로마로 개선한 뒤의 일이다.
국회 파행·쌍용차 사태 등 도 넘은 충돌
2009년 매미 소리가 시끄러운 불볕더위의 복중(伏中), 대한민국은 오욕도 부족해 광기의 역사를 쓰며 극한 대립을 펼치고 있다. 여의도 국회는 파행으로 치닫고 평택 쌍용자동차는 파산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디어법이 방송진입 장벽 해소라는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기존 지상파 방송의 독과점 체제 유지라는 누더기법으로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했지만, 그 와중에 국회출입증도 없는 외부세력인 언론노조의 국회 난입으로 대한민국 18대 국회는 만신창이가 됐다. 세계 유수 언론들이 정치 후진국 한국 국회의 난투극을 내보내며 우리의 유치한 의회민주주의를 비웃었다.
소수가 다수를 부정하며 민주주의의 요체인 다수결의 원리가 ‘여야 합의’라는 도그마에 짓눌리는 한국식 의회민주주의는 유신체제하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과연 무엇이 다른가. 비정규직 보호법 개정, 노동관련법, 공무원 연금법 개정 등 시급한 민생현안을 뒤로한 채 야당 의원들은 미디어법 처리 무효화를 위해 의원직을 총사퇴하고 100일 전국 순회 장외투쟁을 전개하겠다고 선포했다니, 그들이 참으로 국민이 선택한 국회의원인지 의심스럽다.
2월 초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은 노사협상이 여의치 않아 노조원 수백 명이 구조조정을 거부하며 2개월째 공장을 점거하고 있다. 평택의 하늘은 불붙은 타이어 연기로 잿빛이 된 지 오래고, 경찰과 노조원의 충돌은 도시 게릴라전을 방불케 한다.
노조원이 만든 죽봉, 볼트 다연발총, 화염방사기 등은 공권력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다. 노조원이 던진 화염병에 맞아 전경의 몸에 불이 붙자 불을 끄기는커녕 오히려 쇠파이프로 후려치는 비인간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경찰이 전기충격을 주는 테이저 건을 사용해 상황을 진압하기도 했다.
어찌 나라가 이 지경이 됐을까. 누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자신의 뜻을 더 이상 펴지 못하고 ‘해하가(垓下歌)’를 부를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결코 ‘묵시록’에 나오는 종말의 결전장인 아마겟돈이 돼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