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의 지진해일로 새해 아침이 온통 초상집 분위기다. 목숨을 잃은 사람만도 15만명이 넘는다니 그야말로 대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자연 재해로만 치부하기엔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현대 문명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21세기의 세계화는 다름 아닌 희생자들의 다양한 국적으로서의 세계화이고, 인공위성 등 최첨단 장비는 전쟁이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가동됨으로써 지구촌의 정보화마저 인류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겨우 참사 소식을 전하는 정보화였다.
예측한 과학자가 있었다고 하나 그의 말을 귀담아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하는 방심도 있었겠지만 관광 등의 이익 추구에 반하는 것이었으므로 자본주의의 거대한 이름 아래 대재앙의 예측이 적당히 무시됐을 것이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남아시아 대참사를 핏발이 선 눈으로 목도하면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참담한 뉴스 가운데 뒤통수를 후려치는 소식이 하나 있었다. 2만명이 넘게 희생된 스리랑카의 한 야생동물 국립공원에서는 신기하게도 ‘토끼 한 마리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짧은 뉴스였지만 야생동물국 관계자는 “동물들은 제 육감을 갖고 있어 재앙이 언제 일어날지 미리 알아 높은 곳으로 대피한 것 같다”고 전했다.
남아시아 재앙 동물들은 대피 … 욕망 때문에 육감 퇴행
사실 동물들이 인간보다 육감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왔다. 1902년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 생피에르 시민은 3만여명이나 죽었지만 동물 사체는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동물들은 한 달 전부터 피신했던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틀 전에는 심해어가 해안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징조가 있었다. 이처럼 동물들의 뛰어난 육감으로 인한 기이한 행동, 그 징조를 먼저 읽었다면 남아시아의 참사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우리의 조상들도 동물의 육감을 익히 알고 활용해왔다. 청개구리가 울거나 개미 떼들이 줄지어 가면 곧 비가 온다든지,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 배에서 쥐들이 내리면 머지않아 폭풍우가 온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감 혹은 예지력이 뛰어난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라 부르지 않았던가.
지리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섬진강변 용두리에 살던 1998년 7월31일 오후였다. 이 마을에는 20대 중반의 총각이 한 사람 살고 있었는데 정신지체인이었다.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웠지만 그는 언제나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가 청명한 그날 오후 내내 아주 낮은 솔밭산에 올라 산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고 또 울었다. 뒷집 할머니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쟤가 왜 저러지. 날도 좋은데 비가 오려나” 중얼거리며 빨래와 고추를 걷어다 툇마루에 들였다. 그리고 3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상특보가 발효되기도 전에 밤새 천둥 번개가 치더니 지리산에서만 8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뒷집 할머니 말에 따르면 그가 이처럼 심하게 울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이 마을과 지리산의 기상예보관이었다. 그의 예감 혹은 육감은 정확했으나 누구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이따금 청개구리처럼 울면 빨래를 걷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천치(天痴)는 하늘이 내린 어리석음, 하늘이 내린 병이 아닌가.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하늘과의 교감은 가능한 사람이 천치라는 얘기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육감이란 무엇인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 오감을 넘어서는 제6의 감각(the sixth sense)이 아닌가. 부연하자면 육감은 분석적인 사고나 오감 이전의 직감을 말한다. 새해 아침에 남아시아 대참사를 지켜보면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육감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동물들의 육감보다 수백배 뒤지면서 매사를 육감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그 또한 수많은 오류를 감수해야겠지만 자연과의 교감, 생태적인 삶으로서의 육감은 얼마나 소중한가.
진정한 농부나 어부들은 달무리나 구름, 바람의 방향을 보고 일기를 예측했다. 현대인들이 출세를 위한 교육이나 이기적 욕망 때문에 갈수록 잃어버리거나 퇴행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연과의 교감이자 우주적 세계관인 육감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환경 파괴는 재앙을 부르는 인간 교만의 극치이지만, 하늘을 읽고 바다와 바람을 읽어내는 자연과의 교감은 현대인들이 되찾아야 할 고향이자 오래된 미래다. 자연인으로서 인간 최대의 행복은 언제나 탐·진·치(貪·瞋·痴)의 오감을 넘고 넘어 마침내 육감을 타고 온다.
예측한 과학자가 있었다고 하나 그의 말을 귀담아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하는 방심도 있었겠지만 관광 등의 이익 추구에 반하는 것이었으므로 자본주의의 거대한 이름 아래 대재앙의 예측이 적당히 무시됐을 것이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남아시아 대참사를 핏발이 선 눈으로 목도하면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참담한 뉴스 가운데 뒤통수를 후려치는 소식이 하나 있었다. 2만명이 넘게 희생된 스리랑카의 한 야생동물 국립공원에서는 신기하게도 ‘토끼 한 마리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짧은 뉴스였지만 야생동물국 관계자는 “동물들은 제 육감을 갖고 있어 재앙이 언제 일어날지 미리 알아 높은 곳으로 대피한 것 같다”고 전했다.
남아시아 재앙 동물들은 대피 … 욕망 때문에 육감 퇴행
사실 동물들이 인간보다 육감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왔다. 1902년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에서 화산이 폭발했을 때 생피에르 시민은 3만여명이나 죽었지만 동물 사체는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동물들은 한 달 전부터 피신했던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틀 전에는 심해어가 해안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징조가 있었다. 이처럼 동물들의 뛰어난 육감으로 인한 기이한 행동, 그 징조를 먼저 읽었다면 남아시아의 참사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우리의 조상들도 동물의 육감을 익히 알고 활용해왔다. 청개구리가 울거나 개미 떼들이 줄지어 가면 곧 비가 온다든지,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 배에서 쥐들이 내리면 머지않아 폭풍우가 온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감 혹은 예지력이 뛰어난 시인을 ‘잠수함의 토끼’라 부르지 않았던가.
지리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섬진강변 용두리에 살던 1998년 7월31일 오후였다. 이 마을에는 20대 중반의 총각이 한 사람 살고 있었는데 정신지체인이었다.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웠지만 그는 언제나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주인공이었다.
그런 그가 청명한 그날 오후 내내 아주 낮은 솔밭산에 올라 산짐승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고 또 울었다. 뒷집 할머니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쟤가 왜 저러지. 날도 좋은데 비가 오려나” 중얼거리며 빨래와 고추를 걷어다 툇마루에 들였다. 그리고 3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느닷없이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상특보가 발효되기도 전에 밤새 천둥 번개가 치더니 지리산에서만 8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뒷집 할머니 말에 따르면 그가 이처럼 심하게 울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이 마을과 지리산의 기상예보관이었다. 그의 예감 혹은 육감은 정확했으나 누구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이따금 청개구리처럼 울면 빨래를 걷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천치(天痴)는 하늘이 내린 어리석음, 하늘이 내린 병이 아닌가. 사람과의 소통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하늘과의 교감은 가능한 사람이 천치라는 얘기다. 바로 이 점을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육감이란 무엇인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 오감을 넘어서는 제6의 감각(the sixth sense)이 아닌가. 부연하자면 육감은 분석적인 사고나 오감 이전의 직감을 말한다. 새해 아침에 남아시아 대참사를 지켜보면서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육감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동물들의 육감보다 수백배 뒤지면서 매사를 육감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그 또한 수많은 오류를 감수해야겠지만 자연과의 교감, 생태적인 삶으로서의 육감은 얼마나 소중한가.
진정한 농부나 어부들은 달무리나 구름, 바람의 방향을 보고 일기를 예측했다. 현대인들이 출세를 위한 교육이나 이기적 욕망 때문에 갈수록 잃어버리거나 퇴행한 것이 있다면 바로 자연과의 교감이자 우주적 세계관인 육감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환경 파괴는 재앙을 부르는 인간 교만의 극치이지만, 하늘을 읽고 바다와 바람을 읽어내는 자연과의 교감은 현대인들이 되찾아야 할 고향이자 오래된 미래다. 자연인으로서 인간 최대의 행복은 언제나 탐·진·치(貪·瞋·痴)의 오감을 넘고 넘어 마침내 육감을 타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