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의사의 수감 당시 모습.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에 위치한 뤼순 형무소.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1월6일 전화통화에서 “정부는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을 ‘광복 60주년 남북 공동 사업’으로 정하고 당국 간 대화가 재개되는 대로 북한에 제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유해 발굴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경우 남북 간 화해 기류는 전방위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 문화 등의 분야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남북 협력이 당국 간 대화 재개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실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집권 중반기를 맞은 참여정부로서는 ‘올인’하고 싶은 대형 프로젝트라고 할 만하다.
남북 대화 물꼬 틀 계기 될까 ‘관심’
문제는 실제로 유해를 발굴할 수 있느냐는 점. 그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시도된 유해 발굴 작업이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발굴 가능성에 대한 통일부의 태도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통일부 관계자는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한 자료와 정보가 어느 때보다 축척된 상태”라며 자신감을 표시한다. 안 의사가 사망한 지 95년. 과연 안 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까.
안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했다. 그는 11월1일 뤼순 형무소로 이송된 이후 다음해 3월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해는 형무소 뒤편 언덕에 묻혔다. 뤼순 형무소는 현재의 랴오닝성 다롄시에 있는데,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직 없다.
이 형무소의 주인은 동북아 정세의 변화에 따라 러시아와 일본, 장제스 군대, 중국 공산당 등으로 수시로 바뀌었다. 또 안 의사 처형 후 형무소는 확장 공사까지 해 과거 흔적을 걷어냈다. 여기에 1945년 패망한 일본군이 형무소 관련 서류를 불태워버린 것도 안 의사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다.
이런 상황에도 끈질기게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에 나선 사람들은 많다.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崔書勉) 원장과 한중친선협회 이세기(李世基 ) 회장(전 통일부 장관)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 원장은 중국과 일본을 돌며 안 의사 유해 발굴에 평생을 바친 인물. 사료에 근거한 그의 역사연구 및 탐험은 내로라하는 한국과 일본의 사학자들이 모두 손을 들 정도. 최 원장은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한국과 일본, 중국을 수시로 오갔고 그 결과 안중근 관련 자료에 관한 한 누구 못지않게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고의 중국통으로 평가받는 이 회장은 중국 내 인맥을 통해 최 원장 지원에 나서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동생 정근, 공근씨와 홍석구 신부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모습(왼쪽 작은 사진).
형무소장 딸 통해 당시 사진 얻어
안 의사 부하 및 지인들로 보이는 인사들이, 체포된 안 의사를 살리기 위해 구명운동을 벌인 일도 이마이 후사코가 최 원장에게 공개한 비화. 이마이 후사코의 전언에 따르면 안 의사가 뤼순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여러 차례에 걸쳐 형무소장의 집으로 돌에 묶인 편지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대의명분에 입각, 의사 안중근을 풀어주라”는 압박과 “원하는 만큼 돈을 주겠다”는 회유가 편지의 주된 내용이었다고 한다. 날아든 돌로 인해 수시로 집안 유리창이 깨졌고 형무소장은 결국 경비를 강화, 안 의사 동지들이 자행한 한밤의 돌 테러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1910년 3월 어느 날 형무소장은 이마이 후사코에게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훗날 이마이 후사코는 “그날이 바로 안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로 기억했다. 당시 10세 전후의 어린 나이로 하루 종일 방안에 갇혀 있던 이마이 후사코는 오후 들어 갑갑증을 이기지 못해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어떤 사람이 축 늘어져 들것에 실려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형무소 직원으로 보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고 얼마 뒤 형무소 뒷동산에서 사람들이 삽질을 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마이 후사코는 훗날 자신을 찾은 최 원장 일행에게 사진 2장을 내밀며 “여기가 바로 그때 삽질을 하고 사람을 묻은 곳”이라며 화살표 표시를 했다. 그 사진은 1911년 뤼순 형무소 재감사자 추도회 직후 형무소 직원들로 보이는 군복 차림의 10여명과 재감사자 가족들로 보이는 20여명의 사람들이 기념 촬영한 것이었다. 이마이 후사코는 이 사진 한쪽에 굵은 화살표 표시를 했고 그곳이 바로 안 의사가 묻힌 곳이라고 귀띔한 것이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왼쪽)과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
이 작업을 지켜봤던 최 원장의 한 지인은 “사진을 통해 형무소 뒷동산의 위치와 크기 및 안 의사가 묻힌 대강의 위치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 원장과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뤼순 형무소를 직접 방문, 마지막 현장 검증을 했다. 이 실사단에는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도 동행했다. 김 전 장관은 1월6일 전화통화에서 “(유해 발굴을) 추진 중이라 뭐라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2004년 12월22일 중국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이 우방궈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환담하고 있다.
최 원장이 안 의사의 묘역 위치를 구체적으로 파악해나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회장의 지원이 자리잡고 있다. 최 원장이 길이 막히거나 자료 확인이 불가능할 경우 이 회장이 자신의 중국 인맥을 동원, 길을 제시한 것. 대표적인 활동이 98년부터 후진타오 주석을 상대로 안 의사 유해 발굴 관련 지원을 요청한 외교 활동. 이 회장은 98년 4월 한국을 방문한 후진타오 당시 국가 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당신은) 안중근이 누군인지 알지 않느냐”며 유해 발굴 지원을 요청했다. 후진타오 부주석은 “중국인으로 잊을 수 없는 분”이라며 안 의사에게 호의를 보였고, 1년 뒤인 99년 이 회장이 베이징을 방문해 다시 만나 발굴 문제를 언급하자 그는 “자료가 있겠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중국 정부, 그동안 대북관계 고려 ‘소극적’
다이빙궈 당시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장과 권병현 주중 한국대사가 배석한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일본과 중국 등지를 돌며 자료를 모으고 있고 상당한 성과가 있다”고 답변했다. 이에 후진타오 부주석은 “자료가 정리되면 연락해달라”고 화답했다. 이후 후진타오 부주석은 다롄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안중근 관련 자료를 소중하게 보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1월3일 안 의사 묘역 위치도와 사진 자료, 그간의 연구 및 분석 결과 등을 담은 ‘밀서’가 후진타오 주석 앞으로 날아갔다. “자료가 있으면 보내달라”는 후진타오 주석의 요청을 받은 지 7년 만에 자료가 전달된 셈이다.
민간인 신분인 최 원장과 이 회장의 안 의사 유해 발굴 노력은 한국 정부는 물론 중국 정부도 상당 부분 인지하고 있다. 특히 우리 정부는 두 인사가 내놓은 가시적 성과를 토대로 안 의사 발굴에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태세다. 지난해 11월29일 라오스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에게 “안 의사 유해를 발굴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특별히 부탁하기도 했다. 정부 측은 발굴 작업에 필요한 예산 등을 마련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에 위치한 뤼순 형무소 모형. 위쪽 원 안이 안 의사가 순국한 교형실이고, 아래쪽 원 안이 1945년 전까지 사용된 교형실이다.
정부는 이런 중국 측 처지를 감안, 안 의사 유해 발굴 사업에 북측이 동참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그동안 남북 정부는 물론 민간 차원에서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을 위한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상자기사 참조). 남북이 공동으로 발굴 작업에 나설 경우 경색 국면에 빠진 남북관계를 개선시키는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또 정상회담을 향한 상호간의 신뢰 회복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 1910년 3월 사형을 앞둔 안 의사는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내 유해는 하얼빈(哈爾濱) 공원 곁에 묻어뒀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조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광복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안 의사의 그 유언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