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 총리가 2004년 3월26일 오전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대통령권한대행 자격으로 일자리만들기위원회 제1차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고건 전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가 37세의 나이로 최연소 도지사에 오른 게 30년 전 일이다. 그는 7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도지사,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 서울시장, 국무총리, 민선 서울시장, 대통령권한대행 국무총리 등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경력을 쌓았다. 게다가 최근엔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독차지하고 있다. 왜 국민들은 고 전 총리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있을까. ‘고건 현상’의 끝은 어디일까.
67세의 노(老)행정가 고 전 총리는 한국 정치의 수수께끼다. 그는 광화문과 여의도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야인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2004년 9월 ‘한겨레21’ 여론조사에서 현역 정치인들을 누르고 선두를 차지한 이래 부동의 ‘차기 대통령감’ 1위를 이어가고 있다. ‘치받기’ ‘튀기’가 차세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가운데 도전적이지 않고 감성적이지도 않은 캐릭터로 인기몰이를 하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패기 대신 경륜을 원하기 시작했다거나 정쟁에 질린 대안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그 어떤 것도 ‘고건 현상’을 시원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정치권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고건 현상’을 일으켰다고 풀이한다. 현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고 전 총리의 부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정창교 수석전문위원은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사회적 갈등이 큰 상황에서 국민통합에 대한 욕구와 안정감에 대한 바람이 고 전 총리에 대한 구애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30% 안팎을 오가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 싸움에 매몰된 기성 정당들에 대한 분노가 ‘고건’이라는 도피처를 찾았다는 것이다.
수도권과 영·호남 30, 40대에서 골고루 호감
KSOI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고 전 총리는 인지도에서 80%를 넘겨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정동영 통일부 장관, 이명박 서울시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전체 유권자 10명 중 4명가량이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손학규 경기도 지사를 아예 모르는 것과 대비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인지호감도, 즉 특정 인사를 알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 중 호감이 간다고 응답한 층의 비율에서 고 전 총리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절반 이상의 유권자가 호감이 없다고 답한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거부감을 나타내는 유권자가 적다는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첫 번째 관전 포인트다.
고 전 총리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론조사 결과를 새겨 읽게 한다. 고 전 총리가 1위로 꼽힌 조사는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느냐’를 물은 게 아니라 호감도나 능력을 물은 것이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파문으로 63일간 대통령권한대행을 수행하면서 국정 공백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했던 기억과 부패에 연루된 적이 없는 청렴한 이미지 덕에 호감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고 전 총리는 또 대통령권한대행 체제가 종료된 뒤 노 대통령이 후임 장관 임명 제청을 요구하자, “형식을 차리기 위한 제청권은 행사하지 않겠다”며 소신 행보를 보여 강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가 특정 정파에 속해 있지 않고, 제 정파들이 욕을 먹는 상황에서 얻은 높은 호감도가 대선에서의 지지율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전망은 그 때문에 나온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고 전 총리는 거부감은 적은 만큼 호감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말실수로 비난을 받은 적도 없고, 특별히 책잡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유권자들이 고 전 총리를 대안으로 본다고 여길 수는 없다. 여야 모두 확실한 차기주자가 없어 지지층이 결집하지 않았을 뿐, 군웅할거 이후 비교적 또렷한 주자가 나타나면 특수한 정치 환경이 만들어낸 고 전 총리의 인기가 거품처럼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고 전 총리가 ‘가장 호감이 가는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하면서 나타난 또 다른 특징으로는 판별 분석 결과에서 수도권과 영·호남, 30·40대에서 고 전 총리에 대한 호감도가 골고루 높게 나오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지역 및 세대 변수는 한국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다. 고 전 총리가 지역 및 세대와 무관하게 고루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여론조사 결과를 새겨 읽게 만드는 두 번째 관전 포인트다.
“기존 정치권 불신으로 반사이익 … 지금 인기는 찻잔 속 태풍”
KSOI 조사 결과 고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과 한나라당 지지층에서 각각 2위로 나타났다. 우리당과 한나라당에서 유력 주자가 부상할 경우 그만큼 입지가 좁아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정치 혐오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높은 선호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당 지지 기반이 없다는 점은 종국엔 한계가 될 것이라는 분석. 이와 관련해 우리당 한 의원의 전망이 눈길을 끈다.
“고 전 총리가 기성 정치권에 들어오는 순간 그가 누리던 프리미엄은 모두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때 묻지 않은 야인이 아니라 반대 세력에 욕먹는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그가 어느 정치 세력을 선택하건 반대 세력 지지자들의 계속된 지지를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권의 분석은 이렇듯 ‘찻잔 속의 태풍’ ‘언젠가는 걷힐 거품’이라는 데 모아진다. 현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일시적으로 반영된 것일 뿐 충성도 높은 지지층이 없어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여권의 한 재선의원은 “개혁 정책이 자리를 잡아가면 안정에 대한 동경이 사라질 것”이라며 ‘거품’이라고 단언했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대통령 후보 고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 대통령이 워낙 국정운영을 잘못한 탓에 권한대행을 하며 안정감을 준 고 전 총리가 일시적으로 ‘반사 이익’을 보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다만 민주당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당 일각에서 고 전 총리를 영입하기 위해 물밑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민주당 핵심당직자는 “현실적으로 고 전 총리가 한나라당을 선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당보다는 민주당에 입당하는 게 고 전 총리에게도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민주당은 2007년 대선에서 유력 후보를 내 여권과 협상에 나서는 카드를 검토할 수 있다. 이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여론조사를 통한 막판 담판을 연상케 한다.
제3후보는 2007년 정국이 요동치면서 정치 환경이 급변해 특정 정파가 고 전 총리를 추대하는 상황 등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고 전 총리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이인제 정몽준 후보는 각각 제3후보로서 판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제3후보의 캐스팅보트 구실은 최근 한국 대선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그러나 고 전 총리가 민주당을 선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견해가 더 많다.
현실적으로 고 전 총리가 우리당이나 한나라당에서 경선을 거쳐 후보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정치권의 지지 기반, 즉 세가 없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와 가까운 한 원로 인사는 “떼거리가 필요한 현 정치 상황에서 돈도 없고 세도 없는 고 전 총리가 운신할 폭은 매우 좁다”고 인정했다. 고 전 총리가 고문을 맡고 있는 다산연구소의 고위관계자 역시 “특정 정파가 고 전 총리를 후보로 추대하거나 정치 지형이 획기적으로 변한다면 모를까 현재의 정당 구조 아래에서는 고 전 총리의 성격을 미뤄볼 때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고 전 총리는 대안 부재 상황에서 유권자들의 욕구와 기대치를 충족해줄 수 있는 지도자인지에 대해 검증을 받은 적이 없다.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행정 관료로는 성공했지만 그를 ‘정치 지도자’로 인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당과 한나라당에서 대안이 제시될 경우 고 전 총리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이 빠르게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은 그래서 나온다.
‘고건 대안론’은 97년, 2002년 대선을 앞두고도 제기된 바 있는 낡은 이슈다. 정치권에선 고 전 총리가 특유의 ‘기다림의 정치’를 시작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고 전 총리는 아직 스스로를 해금하지 않았다. 정치에 대한 질문엔 소이부답(笑而不答) 묵묵부답(默默不答)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게 그 이유다. 세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고른 지지를 받는 유일한 당대 정치인, 고 전 총리의 인기는 한철 지나가는 바람에 그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