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7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사퇴를 표명하고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서고 있는 이기준 교육부총리(앞줄 왼쪽).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교육 8개월 대계’란 말이 나돌았다. 2002년 1월 한완상 당시 교육부 장관이 임기 1년을 채우고 경질되자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일곱 차례나 바뀐 교육부 장관의 평균 임기가 8개월밖에 되지 않음을 비꼬면서 나온 말이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배출된 교육부 장관이 모두 48명, 평균 임기가 1년 남짓에 불과하니 릴레이 경주에서 숨 가쁘게 배턴 터치하듯 교육부 장관을 갈아치우는 것이 마치 우리 교육의 구구한 전통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여론 무마 희생양·정치 이해관계 따라 교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통솔하는 교육부 장관이 동네 통장보다 더 자주 바뀌는 이유는 대체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함이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다. ‘용병’ 발언으로 물의를 빚자 해임된 김숙희 34대 장관, 부인과 딸의 이중국적·주식 편법 취득 등 구설에 휘말려 물러난 송자 41대 장관 등이 개인 문제로 물러난 경우라면, 교원정년 단축으로 교원들의 반발을 산 이해찬 38대 장관과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파동의 한복판에 선 윤덕홍 3대 교육부총리 등은 악화된 여론 무마를 위한 ‘희생양’이었다. 때때로 대통령의 ‘충신’에게 자리를 배려하기 위한 교육부 장관 교체도 있어온 게 사실이다.
이처럼 교육부 장관이 교체될 때마다 ‘일관된 교육개혁 정책 실현이 불투명해졌다’ ‘교육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등의 비난이 거세게 일어왔다. 당장 교육부 안팎에서는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경질로 그가 지금까지 추진해온 정책이 추진력을 잃고 캐비닛에 처박힐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안병영 전 부총리의 정책보좌관을 지낸 하연섭 교수(연세대 행정학과)는 “지난 1년 동안 20여개 교육 정책을 발표했고, 20여개 정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며 “미발표 정책은 포기한다 하더라도 이미 발표한 정책들은 상당 기간 준비와 전제 조건 충족 노력이 필요한데 새 장관 체제에서 그것이 가능할지 미지수”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2004년 말 ‘수월성 정책’의 일환으로 발표한, 수학과 과학 분야에 박사 학위 소지자를 고등학교 교사로 발탁하는 방안도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하 교수는 “지난 연말 공청회를 연 교원양성연수평가제도 개선안도 교원단체와 상당한 의견 조율이 필요한 과제”라며 “지속적인 정책 추진이 가능할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지방교육행정개선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기우 교수(인하대 사회교육과)는 “참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던 ‘교육자치제’는 세 번에 걸친 교육부 장관 교체로 추진력을 잃은 상태”라고 말했다. 윤덕홍 교육부총리 시절 교육부 실무진과 7∼8개월 동안 일반행정과 교육행정을 일원화하는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왔는데, 안병영 교육부총리로 교체되면서 새로 발령받은 실무진과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했기 때문에 정책 추진 일정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정부의 최종안 마련 목표 시점도 자꾸 늦춰졌다. 애초엔 2004년 정기국회에 정부안을 제출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장관 교체로 정부 최종안 마련 시점이 지난 연말로 연기됐다. 이 교수는 “새 장관이 오면 정책 추진의 필요성부터 오리엔테이션을 새로 해야 한다”며 “안병영 전 부총리의 경우 교육부 장관 재직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금세 이야기가 통했지만 다음 교육부총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장관 교체가 교육개혁의 큰 틀까지 바꾸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의 교육개혁 정책 방향은 95년 마련된 ‘5·31 교육개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교육 전문가들의 견해다. 즉 5·31 교육개혁이 강조했던 대로 수요자 중심 교육, 대학 자율화 확대 방향으로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개별 교육 정책은 장관 교체와 더불어 부침을 거듭해왔다. 37대 장관을 지낸 이명현 교수(서울대 철학과)는 “전체적인 개혁 방향은 바뀌지 않으면서도 개별 추진 정책은 지연, 축소, 왜곡되거나 추진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켜왔다”고 평가했다.
참여정부 교육자치제 추진력 잃은 상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인수위원회 시절 교육 정책 수립에 관여했던 엄기형 교수(한국교원대 교육학)는 그 대표적 사례로 ‘교육발전 5개년 계획’(98년)과 ‘두뇌한국21(BK21)’ 사업(99년), 그리고 ‘교직발전종합방안’(99년)을 꼽았다. 엄 교수는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추진하던 교육발전 5개년 계획은 그가 물러난 뒤 흐지부지되다 폐지됐고 시작부터 온갖 잡음이 일었던‘BK21’은 대학 구조조정이라는 원래 목적은 상실한 채 나눠 먹기식으로 변질됐다. 또 ‘교직발전종합방안’은 원안보다 많이 축소되었다”고 평가했다.
98년 3월 발표된 ‘교육발전 5개년 계획 시안’은 2003년까지 113조원을 투자해 국립대 민간 매각, 대학 입학정원 자율화, 학급당 최대 학생수 대폭 축소, 중학교 의무교육 확대 등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이다. 이 시안은 발표 당시 ‘지금까지 추진해온 일선 교육 현장의 개혁 조치와 맥락을 같이하면서 입시 학벌 위주의 기존 교육 체제를 탈피하는 정책’으로 평가받는 등 국민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이해찬 장관 후임으로 보수적 인사인 김덕중 장관이 부임하면서 사학 측 기득권 견제에 소홀한 태도를 취하는 등 취지가 흐지부지됐다.
김대중 정부 1대 교육부 수장인 이해찬 장관이 적극 추진한 ‘BK21’ 사업도 국립대 정원 축소를 위한 구조조정 차원에서 진행됐으나, 후임 김덕중 장관이 취임 당일 각 대학들로부터 충분한 사전 의견 수렴이 미진하다는 이유로 대학원 육성방안 시행을 유보시키면서부터 추진력을 잃었다. 당초 교육부는 “3년간 1차 사업을 시행하고 이후 2차 사업을 한다”고 발표했으나 관련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2차 사업이 취소됨으로써 이에 참여했던 대학 연구팀들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편 교원 정년 단축으로 흉흉해진 교원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추진된 ‘교직발전종합방안’은 이를 도맡았던 김덕중 장관이 취임 7개월 만에 물러나면서 지연과 축소를 거듭했다. 그리고 추진 발표 2년4개월 만에 발표된 방안은 교원단체 및 일선 교사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줬다. 수석교사제 시행, 교원병역특례제, 교원 보수체계 개편, 일선 학교 교원인사자문위원회 운영 등이 모두 흐지부지되고 만 것이다.
1999년 7월8일 열린 ‘BK21’ 사업의 전면 수정을 요구하는 교수 집회.
업무 파악에만 6개월 … 최소 2년은 보장해야
결국 교육부 장관의 잦은 교체는 일관된 교육개혁 정책 추진에 심각한 저해요소로 작용한 셈이다. 업무 파악에만 최소 6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평균 임기 1년 동안 교육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연섭 교수는 잇단 교육개혁 정책 실패 원인에 대해 “교육 문제는 온 국민의 이해관계가 걸린 대단히 복잡하고 이해 갈등이 심각한 분야이기 때문에 일관된 정책 추진이 매우 어렵다”면서 “거기에다 교육개혁을 길고 어려운 과정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사건’으로 인식하는 정부와 국민의 시각도 실패에 한몫하고 있다”고 평했다. 미국에서는 9·11테러 사태에 책임지고 물러난 장관이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우리 국민은 사건이 터지면 해당 부서 장관이 물러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
교육 전문가들은 교육개혁 정책의 일관된 추진을 위해 교육부 장관 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40대 교육부 장관을 지낸 문용린 교수(서울대 교육학과)는 “취임 이후 대학 자율화 추진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7개월 만에 사퇴하면서 마무리하지 못했다”면서 “아이디어를 법령으로 만들어 현장에 적용하는 과정까지 마쳐야 교육개혁을 이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 2년이란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37대 장관을 지낸 이명현 교수(서울대 교육학과)는 “장관 업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잘하는 것인지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다”면서 “일관된 교육 정책 추진을 위해서는 장관끼리도 인수인계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기형 교수는 “참을성 있게 교육 정책 추진과 실현, 결과를 기다리지 못하는 풍토가 교육부 장관의 수명을 짧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교육 정책에는 정답이 없다. 옳으면 얼마나 옳고 틀리면 얼마나 틀리겠는가. 아무리 유능한 장관이 나온다 하더라도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조금 어긋난다 하더라도 일관성 있게 꾸준히 교육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