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된 왕후닝(王?寧·53·사진)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은 한마디로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막료(幕僚)이자 ‘꾀주머니’다. 그는 장 전 주석의 해외 순방 때마다 ‘주석 특별 조리’라는 직제에 없는 직함으로 수행단에 합류했다.
중국의 정치개혁과 민주화에 관련한 장 전 주석의 발언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정치민주화에 관한 그의 독특한 이론은 장 전 주석 시절부터 시작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집권하는 현재까지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고수하는 지도노선이다.
왕 주임 이론의 핵심은 정치체제는 일정한 역사·사회·문화적 조건에 맞아야 하고, 민주정치는 절대로 현 중국의 역사적 단계와 조건을 뛰어넘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당제와 보통선거에 따른 지도자 선출을 핵심으로 하는 서구의 민주제도를 왜 중국은 실시할 수 없느냐는 일부 급진파의 주장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생산력(경제) 발전을 먼저 이루고 이를 주축으로 민주정치를 발전시켜야만 실질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 나무를 접붙이듯 중국의 정치개혁은 이룩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논리다.
장 전 주석은 1995년 9월 열린 제14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왕 주임의 이론을 인용해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개혁과 발전, 안정의 3자 관계’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 가운데 개혁과 발전을 추진해야 하고, 개혁과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만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 한마디로 안정의 기초 위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할 때만 중국의 진보와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그의 이론은 이후 중국 공산당이 정치개혁과 민주화 조치를 미룰 때마다 논리적 근거로 사용됐다.
1995년부터 공산당 지도부 고수하는 이론
2000년 장 전 주석이 발표한 ‘3개 대표론’도 그가 창안해낸 것이다. 3개 대표론이란 공산당이 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선진 생산력(자본가)과 선진문화(지식인)의 근본 이익까지 모두 대표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조적(祖籍·조상의 원적)은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시지만, 그는 1955년 10월6일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철학을 좋아했고 정치적 사고를 즐겨 하는 경향을 보였다. 74년 화둥(華東)사범대에서 프랑스어를 3년간 전공했지만 외교 계통으로 나가지 않고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석사를 마쳤다. 개혁개방 뒤 제1세대 정치학 연구생인 그의 지도교수는 자본론 연구로 권위 있는 천치런(陳其人)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푸단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80년대 중반 쩡칭훙(曾慶紅) 당시 상하이 선전부장의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줄곧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그가 1995년 베이징(北京)의 중앙정책연구실로 오게 된 것은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쩡 부장과 상하이 당서기를 지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힘이 컸다.
한때 왕 주임을 정치고문으로 쓰려 했던 우 위원장은 1994년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중앙서기처 서기로 옮긴 뒤, 장쩌민 당시 주석에게 여러 차례 “왕후닝을 베이징으로 불러와야 한다”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 주석은 당시 그를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러올린 후 그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번에 너를 불러올리지 않았으면 나와 우리 계파 사이가 틀어질 뻔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소문난 책벌레 … 후진타오 감시인 소문도
그는 1987년 13차 당 대회 때부터 시작해 학자로는 유일하게 세 번 연속 정치보고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16차 당 대회 때 장 전 주석은 정치보고 기초작업의 실무 책임을 아예 그에게 맡겼다. 그만큼 장 전 주석의 신임이 두터웠다.
하지만 1995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뒤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을 거쳐 98년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 2003년 4월 주임으로 벼락출세하며 그는 학계에서 적잖은 입방아에 올랐다. 특히 주임 자리는 상급자인 텅원셩(藤文生·68) 주임을 중앙문헌연구실 주임으로 쫓아내고 차지한 것이어서 ‘하극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중앙정책연구실은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연구하는 중국 공산당의 싱크탱크다. 중앙정치국의 정치 이론 및 정책 연구와 문건의 기초작업은 모두 이곳에서 이뤄진다. 그만큼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가 실력도 없으면서 정계 실력자들에게 줄을 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의 제자인 푸단대 일본연구중심 궈딩핑(郭定平) 부주임은 “푸단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마다 그의 서명이 없던 책이 없었다”며 “그의 성실함과 근면함은 항상 나의 본보기였다”고 털어놨다. 푸단대에서는 책을 빌려가는 사람은 반드시 도서열람 카드에 서명하도록 돼 있다.
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저우치(周琪)에 따르면, 결혼 직전 그에게 결혼식에 사용할 물건과 생화(生花)를 사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저녁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가 가져온 것은 한아름의 책이었다는 것. 그가 얼마나 ‘책벌레’였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전 그냥 독서인(讀書人·책 읽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일생에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좋은 책 몇 권 읽고, 좋은 학생 몇 명 가르치고, 좋은 책 몇 권 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책을 폭넓게 읽어선지 그의 논문은 심도 있으면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논문은 중국의 당대 지도부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를 다룬 데다 친절하게 대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2002년 11월 후 주석이 집권한 이후에도 그는 ‘주석 특별 조리’로 후 주석의 해외 방문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그를 일각에서는 ‘장 전 주석의 대리 감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후 주석의 정치노선을 감시하는 장 전 주석의 원단(文膽·핵심 막료)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이론가인 왕 주임의 조언을 바탕으로 후 주석이 정치개혁 및 민주화와 관련해 자신의 집권 2기(2007년 말∼2012년 말)에 어떤 길을 걸을지 주목된다.
중국의 정치개혁과 민주화에 관련한 장 전 주석의 발언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정치민주화에 관한 그의 독특한 이론은 장 전 주석 시절부터 시작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집권하는 현재까지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고수하는 지도노선이다.
왕 주임 이론의 핵심은 정치체제는 일정한 역사·사회·문화적 조건에 맞아야 하고, 민주정치는 절대로 현 중국의 역사적 단계와 조건을 뛰어넘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당제와 보통선거에 따른 지도자 선출을 핵심으로 하는 서구의 민주제도를 왜 중국은 실시할 수 없느냐는 일부 급진파의 주장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생산력(경제) 발전을 먼저 이루고 이를 주축으로 민주정치를 발전시켜야만 실질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 나무를 접붙이듯 중국의 정치개혁은 이룩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논리다.
장 전 주석은 1995년 9월 열린 제14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왕 주임의 이론을 인용해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개혁과 발전, 안정의 3자 관계’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 가운데 개혁과 발전을 추진해야 하고, 개혁과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만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 한마디로 안정의 기초 위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할 때만 중국의 진보와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그의 이론은 이후 중국 공산당이 정치개혁과 민주화 조치를 미룰 때마다 논리적 근거로 사용됐다.
1995년부터 공산당 지도부 고수하는 이론
2000년 장 전 주석이 발표한 ‘3개 대표론’도 그가 창안해낸 것이다. 3개 대표론이란 공산당이 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선진 생산력(자본가)과 선진문화(지식인)의 근본 이익까지 모두 대표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조적(祖籍·조상의 원적)은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시지만, 그는 1955년 10월6일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철학을 좋아했고 정치적 사고를 즐겨 하는 경향을 보였다. 74년 화둥(華東)사범대에서 프랑스어를 3년간 전공했지만 외교 계통으로 나가지 않고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석사를 마쳤다. 개혁개방 뒤 제1세대 정치학 연구생인 그의 지도교수는 자본론 연구로 권위 있는 천치런(陳其人)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푸단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80년대 중반 쩡칭훙(曾慶紅) 당시 상하이 선전부장의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줄곧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그가 1995년 베이징(北京)의 중앙정책연구실로 오게 된 것은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쩡 부장과 상하이 당서기를 지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힘이 컸다.
한때 왕 주임을 정치고문으로 쓰려 했던 우 위원장은 1994년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중앙서기처 서기로 옮긴 뒤, 장쩌민 당시 주석에게 여러 차례 “왕후닝을 베이징으로 불러와야 한다”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 주석은 당시 그를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러올린 후 그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번에 너를 불러올리지 않았으면 나와 우리 계파 사이가 틀어질 뻔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소문난 책벌레 … 후진타오 감시인 소문도
그는 1987년 13차 당 대회 때부터 시작해 학자로는 유일하게 세 번 연속 정치보고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16차 당 대회 때 장 전 주석은 정치보고 기초작업의 실무 책임을 아예 그에게 맡겼다. 그만큼 장 전 주석의 신임이 두터웠다.
하지만 1995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뒤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을 거쳐 98년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 2003년 4월 주임으로 벼락출세하며 그는 학계에서 적잖은 입방아에 올랐다. 특히 주임 자리는 상급자인 텅원셩(藤文生·68) 주임을 중앙문헌연구실 주임으로 쫓아내고 차지한 것이어서 ‘하극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중앙정책연구실은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연구하는 중국 공산당의 싱크탱크다. 중앙정치국의 정치 이론 및 정책 연구와 문건의 기초작업은 모두 이곳에서 이뤄진다. 그만큼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가 실력도 없으면서 정계 실력자들에게 줄을 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의 제자인 푸단대 일본연구중심 궈딩핑(郭定平) 부주임은 “푸단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마다 그의 서명이 없던 책이 없었다”며 “그의 성실함과 근면함은 항상 나의 본보기였다”고 털어놨다. 푸단대에서는 책을 빌려가는 사람은 반드시 도서열람 카드에 서명하도록 돼 있다.
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저우치(周琪)에 따르면, 결혼 직전 그에게 결혼식에 사용할 물건과 생화(生花)를 사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저녁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가 가져온 것은 한아름의 책이었다는 것. 그가 얼마나 ‘책벌레’였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전 그냥 독서인(讀書人·책 읽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일생에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좋은 책 몇 권 읽고, 좋은 학생 몇 명 가르치고, 좋은 책 몇 권 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책을 폭넓게 읽어선지 그의 논문은 심도 있으면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논문은 중국의 당대 지도부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를 다룬 데다 친절하게 대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2002년 11월 후 주석이 집권한 이후에도 그는 ‘주석 특별 조리’로 후 주석의 해외 방문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그를 일각에서는 ‘장 전 주석의 대리 감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후 주석의 정치노선을 감시하는 장 전 주석의 원단(文膽·핵심 막료)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이론가인 왕 주임의 조언을 바탕으로 후 주석이 정치개혁 및 민주화와 관련해 자신의 집권 2기(2007년 말∼2012년 말)에 어떤 길을 걸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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