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누워 있는 캄보디아의 에이즈 환자.
실제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를 강타한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전사자를 능가했으며, 각종 전쟁 중 총기에 희생된 사람보다 세균 감염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한때 남아메리카를 지배하던 잉카문명이 스페인 군대에 맥없이 무너진 이유도 스페인 군대가 감염시킨 천연두 균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류 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과 질병에 의해 변화하고 진보해왔다.
왕족 잇단 혈우병으로 유럽 역사 급변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윈 셔먼 명예교수는 신간 ‘역사를 바꾼 12가지 질병들’을 통해 질병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을 분석했다. 이 책에서 언급된 12가지 질병은 천연두, 결핵, 매독, 에이즈, 인플루엔자, 선페스트(흑사병), 콜레라, 말라리아, 황열병, 혈우병, 포르피린증, 감자마름병이다. 천연두 에이즈 등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질병이지만, 혈우병과 황열병이 인류 역사를 바꿨다는 해석은 좀 의외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 가장 위협적인 질병으로 꼽힌 콜레라(왼쪽). 인류에게 항생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 결핵.
한때 유럽과 아시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천연두는 남아메리카의 잉카 및 마야 문명, 북아메리카의 아메리칸인디언까지 몰살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천연두는 백신 개발로 현재 지구상에서 사라진 상태. 셔먼 교수는 “천연두 박멸을 통해 인류는 제아무리 무서운 질병도 의학으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평했다.
키츠나 쇼팽 등 예술가들의 발병으로 인해 ‘낭만적인 병’으로 여겨졌던 결핵 역시 의학 발전을 가져온 질병이다. 인류는 결핵과 싸우면서 항생제의 중요성을 배웠고 식품에 열을 가해 세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식수를 통해 감염되는 콜레라는 선페스트와 함께 근대 이전 유럽에서 가장 위협적인 질병이었다. 현대에 천연두와 선페스트는 거의 사라진 반면, 콜레라는 여전히 1급 전염병으로 꼽힌다. 19세기 들어 영국 의사 존 스노가 이 병이 오염된 식수를 통해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후 유럽 도시들의 하수도 시스템이 개선되면서 콜레라의 위협은 현저히 줄었다.
천연두와 선페스트 등이 구세계 유럽에서 신세계로 퍼져나간 질병이라면, 콜럼버스 일행이 가지고 온 매독은 신세계가 구세계에 가한 결정적 타격이었다. 더구나 다른 병과 달리 성관계를 통해 감염된다는 사실은 유럽인에게 ‘천형’이라는 공포감까지 안겨줬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무수한 환자들이 매독으로 쓰러졌으며, 감염된 부모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매독 보균자인 아기도 많았다. 유럽 의사들은 수은요법으로 매독을 치료했는데, 이는 매독 균뿐 아니라 환자까지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치료법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이 치료법을 통해 생화학요법이 발전하는 의외의 소득도 얻었다.
현대의 가장 무서운 병이 에이즈라면, 중세에는 선페스트였다. 환자 몸이 까맣게 변한다고 해서 ‘흑사병(Black Death)’이라는 이름이 붙은 선페스트는 14세기 유럽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0만명 이상을 사망케 했다. 셔먼 교수는 “중세인들이 선페스트에 보인 반응은 현대인들이 에이즈에 보이는 반응과 유사한 측면이 많았다”고 지적한다. 즉 공포와 근심, 병자에 대한 편견, 잘못된 미신 등 그 질병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종 괴담만 널리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선페스트가 낳은 부산물도 있다. 중세 최초의 소설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1348년 선페스트가 유행했을 당시를 배경으로 한다. 선페스트를 피해 시골 별장으로 온 남녀 10명이 제각기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데카메론’의 줄거리다.
흔히 독감이라 불리는 인플루엔자 역시 현재도 치명적인 질병이다. 사실 독감처럼 세계 곳곳에 퍼져 있고, 많은 사망자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전 세계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5000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 이는 단일 질병의 유행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례다. 호사가들은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이유가 독감으로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아프리카 풍토병인 말라리아는 과거뿐 아니라 현재도 적지 않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매년 3억명 이상이 말라리아에 걸리고 그중 300만명이 사망한다. 셔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말라리아였다. 유럽인들은 말라리아 치료약인 키니네를 개발했으며, 그 덕에 말라리아에 희생되지 않고 아프리카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기가 옮기는 황열병은 주로 선원이 걸리는 병이었다. 열대 지역을 항해하던 선원들은 고열과 근육통을 앓다 죽어가는 수수께끼 같은 병에 시달렸다. ‘황열병(Yellow Fever)’이란 이름은 환자가 발생한 배에 노란 깃발을 달던 선원들의 관습에서 생겨난 것이다. 셔먼 교수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진단을 내린다. 즉 “북반구 사람들은 부지런하지만, 남반구 사람들은 게으르고 느리다는 선입견이 생긴 것은 황열병이 북반구엔 없고 남반구에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황열병을 옮기는 모기는 북반구의 긴 겨울에는 살아남지 못한다.
식물 병인 ‘감자마름병’은 대기근 초래해 신대륙 이주 촉진
유럽 왕실의 유전병이던 혈우병과 포르피린증은 위의 전염병들과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바꿔놓았다. 셔먼 교수는 스페인 내란과 독재자 프랑코의 등장 원인을 혈우병에서 찾는다. 즉 유럽 왕실들의 근친혼으로 왕족이 잇따라 요절했고, 스페인 왕위 계승자들이 사라지면서 내전과 독재자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환각과 망상 등을 불러일으키는 정신병의 일종인 포르피린증은 영국 왕가의 유전병이었다. 포르피린증 환자였던 조지 3세는 광증 때문에 광대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이성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결국 북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영국의 가혹한 통치를 참다 못해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1776년 미국의 13개 주는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사람이 아닌 식물의 질병인 감자마름병은 가장 의외의 선택인 듯싶다. 셔먼 교수는 이 질병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현재의 미국을 탄생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를 덮친 감자마름병은 아일랜드의 식량원인 감자를 초토화했다. 대기근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인들은 결국 너도 나도 신대륙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리고 이들은 이민 100년 만에 아일랜드계 대통령(존 F. 케네디)을 배출할 만큼 미국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했다. 아일랜드계는 현재도 미국 민주당을 이끄는 주도세력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