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배경으로 유명한 긴카쿠지(金閣寺).
휴가를 즐기기 위해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몇 해 전 가본 교토의 호젓한 산책길이 생각났다. 길가에 자리한 운치 있는 카페와 이름 모를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카푸치노 향기에 대한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경우 곧바로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휴가 날짜를 기다리기만 하면 운명은 현실이 된다.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날아가면 도착하는 교토는 1000년 이상 일본의 수도 구실을 한 도시다. 지금까지도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 일본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다. 아예 정기적으로 찾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도시인 교토는 역사 관련 유물과 사찰이 산재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배경으로 유명한 긴카쿠지(金閣寺)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긴카쿠지(銀閣寺), 구한말 부산에 말사(末寺)를 설치했던 대사찰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마루를 밟으면 꾀꼬리 울음소리가 나서 꾀꼬리 절로 이름 붙여진 니조조(二條城), 정원 미학의 극치인 류안지(龍安寺), 교토 최대의 민속축제인 기온 마쓰리로 유명한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등 도시 전체가 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사카에서 한큐 전철(특급)을 타고 40분가량 달려 교토에 도착했다. 일본의 경우 여행지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여행안내소를 찾아 버스노선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교토 역시 버스노선이 잘 돼 있어 500엔(4500원)짜리 ‘One Day Pass’를 사면 하루 교통비는 해결된다.
여행 내내 미리 연습해둔 “이치니치 조사켄 구다사이(하루 버스표 주세요)”를 능숙하게 말하려 하지만 운전기사 앞에만 서면 두려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소심한 여행자가 돼도 좋다.
교토 날씨는 대개 군더더기 없는 ‘맑음’이다. 걷기에 좋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여인은 차양 넓은 모자에 팔뚝까지 감싸는 토시를 착용한 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의 자전거에는 검은색 우산이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태양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산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씨네큐브에서 오후 1시에 상영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덕분에 교토의 첫인상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교토의 한 청과물 가게(사진 위)와 주택가를 지나는 전통 의상의 여인.
교토여행이 조금 익숙해지면 유적지 중심보다는 ‘일상적인 여행’과 ‘맛있는 여행’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어느 순간 여행이 또 다른 일상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것을 음미하고 싶어진다고 해야 할까? 책 읽고, 음악 듣고, 샤워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커피 마시고, 안부를 묻고, 산책하는(교토는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여행 말이다.
누군가는 한심스러운 눈초리로 “겨우 산책하러 비행기 타고 거기까지 갔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느릿느릿 걷다 보면 어느 때보다 진한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온다. 가이드북에 나오는 명승지에 발도장을 찍지 않아도 말이다.
일본스러운’ 풍경은 골목골목에서 충분히 만날 수 있었고, 우연히 들어간 식당의 간장 맛이 감동을 주기도 했다.
카페에 들어갔을 때나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책을 읽었는데 그중 한 권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였다. 책의 3분의 1을 읽고 설레는 마음으로 ‘금각사’를 찾아갔다. 입구에 늘어선 많은 관광객 중에는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혹시 교토여행 중 한국 사람이 그리워지면 그리로 찾아가도 될 정도였다.
금각은 소설 속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연못 한가운데 고요히 자리한 금각은 소설을 읽으면서 그렸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름이 지나간 자리에 황금빛 햇살이 비치고 어느 순간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금각의 봉황은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났다.
여행 도중 가슴 벅찬 순간을 만나고 싶다면 책을 한 권 준비하는 게 좋다. 여행지가 책 내용의 배경이라면 더욱 좋고, 교토에 온다면 ‘금각사’를 손에 쥐고 금각사를 방문하길 권한다.
이어 정원미학의 극치인 류안지를 둘러보고 자연스레 은각사는 어떤 곳일지 궁금해졌다. 원한다면 바로 버스를 타고 은각사를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토다.
‘맛있는 여행’을 위해 기온으로 향했다. 거리는 사람들로 넘실거렸고 그곳만의 냄새가 여행자의 코끝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게이샤의 분냄새일 수도 있고, 다코야키의 양념 냄새일 수도 있다. 아니면 관광객의 땀냄새가 아닐까.
아마도 배가 고픈 탓에 후각이 예민해진 것이라 판단한 뒤 오코노미야키의 원조격인 ‘잇센 요쇼쿠’를 에피타이저로 먹고, 근처 곤베(우동집)에 가서 갓 뽑은 면으로 만든 우동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디저트로 사료 쓰지리(茶寮 都路里)에서 녹차 파르페를 먹을까 하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아사쿠사 안에 있는 조라쿠칸(長樂館)에서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꼭 먹어야 하는 것(8월 장어요리), 먹고 싶은 것(신선한 스시) 또는 내가 먹은 것(교토의 전통요리-교료리)들은 이야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테니 이쯤 해두겠다.
교토는 하루 만에 여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교토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 대부분이 간사이 지방을 여행하는 3박4일 중 하루 정도만 교토를 지나쳐 간다. 여행 밀도를 높이고 싶다면 과감하게 일정을 바꿔 교토에서 오감을 만족시켜보는 건 어떨까. 일주일이라도 부족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평생을 두고 교토를 그리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