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벽화가 출토된 박익의 묘.
화상시는 박익과 동시대에 살았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그리고 변계량(卞季良)이 지었다. 초상화를 보고 정몽주가 먼저 운을 뗐다. “긴 수염 십 척 장신 잘도 그렸네(畵出長髥十尺身)/ 볼수록 두 얼굴이 참으로 똑같네(看來尤得兩容眞)/ 세상 이치가 자취 없다고 말하지 마소(寞言公道無形跡)/ 죽어도 죽지 않은 사람 되겠네(死後猶存不死人).” 정몽주는 박익과 박익의 초상화를 나란히 보고서 이 시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자리에 길재와 변계량도 함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정몽주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 “봉황의 눈, 범의 눈썹, 십 척 장신에(鳳目虎眉十尺身)/ 담홍 반백의 두상이 참으로 똑같네(淡紅半白兩相眞)/ 그림으로 선생 얼굴 살펴보니(畵圖省識先生面)/ 그림 속에도 죽지 않을 정신 그려져 있네(不死精神影裏人).” 이렇게 읊은 길재는 박익보다 21살이 어려서 박익을 선생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밀양 한 동네 출신으로, 아들의 친구이기도 했던 변계량은 “풍후한 얼굴 덕스러운 몸매(豊厚形容德有身)/ 아무리 보아도 하늘이 내린 분이네(看看優得出天眞)/ 눈 덮은 긴 눈썹, 무릎에 드리운 수염(眉長過目髥垂膝)/ 그림과 사람 마주해도 분별하기 어렵겠네(兩對難分影外人)”라고 묘사했다.
정몽주와 학문 교류, 이성계와 전장 누벼
초상화를 그리고, 그 초상화를 보고 시를 짓는 흥미로운 풍속도가 고려 말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정몽주와 길재가 보았던 박익의 초상화는 언제 소실됐는지 알 수 없다. 훗날 박익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세워질 때마다 이 화상시를 근거로 새로운 초상화가 그려지고, 영정 봉안문(奉安文)까지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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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마을에서 가까운 후사포리에 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박익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심었고, 이 은행나무에서 한 자씩 따서 밀성 박씨 은산파와 행산파가 생겼다.
정몽주가 타살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열자, 박익은 또다시 송계마을로 내려오고 만다. 뒷산이 송악(松岳)이고, 마을이 송계(松溪)인 것은 송도(松都, 開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나섰던 박익에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연달아 내리며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하지만 박익은 눈멀고 귀 멀었다는 핑계를 대며 태조가 내린 교지와 예관을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좌의정을 내렸으나 역시 나서지 않았다. 다섯 번 불렀어도 한 번도 나서질 않아 ‘오징불기(五徵不起)’라고 하는데,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고려를 향한 충절을 지켰다.
박익의 묘 남쪽 벽에 그려진 벽화.
박익은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묻혔다. 묏자리는 경남의 최고 명당으로 꼽힐 만큼 활달하다. 묘는 사각형으로 고려 양식을 띠고 있고, 돌단이 둘러져 있어 웅장하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2000년 9월 두 번째 도굴꾼이 지나간 뒤, 동아대 박물관 주관으로 무덤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이때 고분벽화와 지석, 혼유석 등이 출토돼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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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익 무덤에서 고분벽화 등 출토
고려 말 고분벽화는 존재 자체가 아주 드물다. 천장과 북쪽 그림은 지워지고, 동·서·남쪽 그림은 훼손된 상태지만 빼어난 솜씨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정도로 남아 있었다.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동쪽 벽에는 머리를 땋아 올린 세 명의 여자가 손에 찻상과 그릇을 든 채 걷고 있고, 역시 나무가 그려진 서쪽 벽에도 네 명의 남녀와 술병을 들고 있는 한 여자의 그림이 있다. 남쪽 벽에는 슬픈 눈망울을 한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고려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풍속화인 셈이다. 무덤은 다시 덮여 긴 잠에 들어갔고, 벽화는 2005년 2월에 국가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됐다.
밀성 박씨 송은공파 문중에서는 미려한 고분벽화가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120자의 입지잠(立志箴)과 168자의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한 송은 박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벽화묘 전시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600년이 지났건만, 두문동 72현으로 꼽히는 송은 박익의 삶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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