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오른 화제 문서와 중국 야후(Yahoo)에서 문서를 검색한 창.
중-한 두 나라는 1992년 외교 관계를 맺은 이래 경제·무역이 발전하면서 상호관계를 끊임없이 강화해왔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2004년 고구려 왕국의 역사 귀속 문제가 발생하면서 급격하게 뒤집어졌다. 한국에서는 대통령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이구동성으로 중국의 역사왜곡을 나무라며 ‘고구려는 한국 역사’라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 민중은 또 민족의상을 입고 서울의 중국 대사관 앞에서 밤낮으로 항의했다. 한국의 각계각층 단체들도 각종 방식으로 항의했다. 한국의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정부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며 미국 카드, 대만 카드를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찬 국무총리도 “고구려 역사를 지키는 것은 정부 정책의 첫 번째 의제”라고 선포했다. 한국의 주류 매체도 중국의 역사왜곡을 항의했고, 나아가 정치·경제·민속·체육 등 여러 방면에서 현재의 중국 사회에 대해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면을 보도했다.
2004년 9월17일 중국의 제안에 따라 중-한 역사학자가 서울에서 고구려 역사 귀속에 대한 1차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창시자인
중국 학자 쑨진지(孫進己)가 한 간단한 발언은 격앙돼 있던 한국 정계와 학계, 매스컴을 곤경에 빠뜨렸다.1)현재 한국 측의 중국에 대한 공개적 항의는 중단됐고 논쟁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조용한 이면에는 오히려 여러 가지 반동적(反動的)인 흐름이 숨어 있다. 만일 중국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잠복해 있는 병은 수시로 다시 폭발해 더 큰 외교적 충돌이 일어날 것이며, 두 나라 앞으로의 관계는 물론 중국의 국가 안전과 영토 보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한 양국의 고구려 역사 논쟁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고구려 왕국의 역사와 논쟁의 기원을 이해해야 하고, 나아가 미국 중앙정보국의 배후 역할을 알아야 한다.
1. 고구려 역사는 중국 것인가, 한국 것인가고구려 왕국은 기원전 37년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시작됐다. 중원이 전국과 남북조로 분열되고 내전이 그치지 않는 틈을 타 고구려는 동북에서 확장하여 조선반도까지 뻗어나갔다. 고구려는 중국을 재통일한 중원의 수나라 통치 질서에 반항했다. 이에 수나라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당나라가 들어선 뒤 태종은 “요동은 본래 우리 중원의 고유 국토였으니 결코 분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조서를 내리고 친히 군대를 지휘해 고구려를 토벌했다. 668년 대당(大唐) 군대는 고구려를 섬멸했다.
고구려와 같은 시기 조선반도에는 중부의 백제와 남부의 신라가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200여년 후인 9세기 초에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왕씨고려라는 나라를 열었다.2)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기원이다. 그 후 왕씨고려는 이씨조선으로 왕조를 바꾸었고, 일본 식민기를 거쳐 오늘의 남북 분단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중국 지안에 남아 있는 국내성 성벽의 일부.
동북지역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고구려 시대의 고성과 왕릉 유적이 발굴돼 당시 국내외 고고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95년 중국 정부가 특별비용을 내 ‘동북공정’을 수립, 고구려 문화유산에 대한 전문 연구를 진행했다.3) 이때 남북한 쌍방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2001년 중국은 북한의 압록강 변에서 고구려 고분군을 발견해 유네스코에 유적 신청을 했다.4) 이때 비로소 한국 학계가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2004년 6월 쑤저우(蘇州)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대회에서 중국이 신청한 3곳의 고구려 유적과 북한이 신청한 1곳의 유적이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중국 매스컴은 이를 보도하며 고구려는 중원 왕조에 계속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고구려와 중원은 예속 관계이며,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의 여론은 “조공과 책봉은 고대 아시아의 외교 행위다. 고구려는 독립된 국가이며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다. 만일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면 수나라와 당나라가 자기 지방정권을 치기 위해 군대를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고구려를 중국의 일부분으로 보는 것은 대(大)중국주의에 따른 민족패권 행위”라고 반박했다.
조공은 정해진 때에 정해진 양을 주기적으로 중앙왕조에 바치는 것으로 오늘의 중앙재정 세수와 같은 것인데, 현재 어느 주권국이 다른 나라에 이러한 의무적인 납세를 하는가.5) 또 책봉은 주군이 자국 아래에 있는 군왕이나 군주 등에게 내리는 임명장과 같은 것인데, 지금 어느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다른 나라의 임명장을 필요로 하는가. 명백히 고구려는 주권국의 정의에 부합되지 않는다.6) 다만 이는 1000년 전 고대의 일이고, 당시 주권국에 대한 구체적인 표준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9월17일 국제학술대회에서 선양(瀋陽)동아연구소 연구원 쑨진지는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다. 고구려의 주체는 중국에서 발생했으며, 고구려 원래 영토의 3분의 2가 현재 중국에 위치하고, 당시 고구려 주민의 4분의 3이 중국으로 귀순했다. 고구려 대부분의 역사에서 고구려는 계속 중원에 귀속돼 있었다. 한국은 고구려 역사를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가 계승했다고 주장하지만 고구려는 ‘삼국’에 속하지 않았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합병하고 신라가 백제를 합병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밝혔다.
100명에 가까운 한국 측 전문가 모두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한국의 ‘조선일보’는 “고구려연구재단 연구기획실 임기환 실장은 ‘쑨진지의 주장은 현재의 영토 중심주의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계승권은 현재의 영토주권과 명확히 구분된다’고 반박했다”고 풀 죽은 논조로 보도했다.
산성하무덤떼.
임기환의 말에 조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주권국이라는 한국인의 논점에 비춰본다면 당시 요동과 조선반도에는 중국, 고구려, 백제, 신라 4개의 주권국이 존재하게 된다. 당나라의 명장 설인귀는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고구려는 3개의 수도를 거쳤다)에서 고구려 왕의 무조건 항복문서를 접수한 뒤 대당의 군대가 고구려 전 영토 및 일부 피난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민을 접수했고, 이에 따라 고구려 문화도 자연히 계승했던 것이다. 이때 한국의 전신인 고려는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
고구려가 망한 지 200여년 뒤인 9세기 초에 신라가 백제를 합병해 고려 왕조를 세웠다.7)2. 미 중앙정보국의 음모21세기에 들어와 미국 중앙정보국의 새로운 임무는 중국과 러시아를 해체하고 전방위 배치를 진행하는 것이다. 미국은 실제로 대만과 티베트의 독립을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 외에 신장(新疆)이 독립해 미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만주의 독립은? 미국은 한국에 생각이 미쳤다. 미국은 한국에 “21세기에 중국이 해체될 때 미국은 한국의 만주 병탄을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미국의 약속이 있었기에 한국은 만주를 집어삼키기 위한 장기적인 국가정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 충남대 고고학 교수 박양진은 ‘만주와 한반도는 하나의 문화공동체에 속한다’는 글에서 신석기시대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가 비슷한 반면, 중원에서 출토된 유물은 이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만주와 한반도는 하나의 문화공동체에 속하고, 만주는 역사상 한민족의 무대라는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평생 동안 본 것 가운데 가장 황당한 역사 논증이다.8) 역사문헌을 조사해보면 멀리 신석기시기를 말할 필요도 없이 기자조선으로부터 한사군에 이르기까지 조선반도는 모두 중원 왕조의 유효한 통치 아래 있었으며, 명나라 때까지 반도 중부에 위치한 한강 이북은 중국의 영토였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러한 역사 기록은 한국의 학술계도 예전에 인정했으며 지금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3. 도대체 누가 역사를 왜곡했는가9월17일 국제학술대회가 끝나고 3일 뒤 한국의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중국의 역사학자가 우리의 고구려 역사를 그들의 소수민족사로 편입하려는 기도를 하고 있어 우리 학계에서 전면적인 반박을 했다. 이에 우리는 크게 믿음과 기대를 건다”고 썼다. 이 글에 흥미를 느낀 필자는 한국인이 도대체 어떻게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라고 증명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필자가 본 것은 민주국가에서는 발생해서는 안 될 기이하고 황당한 현상이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든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前 고구려연구회회장) 반론문
| 서길수 교수 1) 쑨진지가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한 글을 많이 썼고 일찍부터 연구를 시작했지만 ‘동북공정’을 창시한 것은 아니다. 동북공정은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시작됐으며, 마다정(馬大正) 같은 관변 학자들이 앞장서면서 쑨진지는 오히려 왕따를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관변 학자들의 검열에 걸려 1999년에 쓴 책을 출판조차 못하고 있다.
2)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멸망시켰다. 필자의 역사 지식이 얼마나 얄팍한지 바로 드러난다. 이런 정도의 상식은 연표를 한 번만 봐도 알 수 있다.
3) 동북공정은 2002~2007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프로젝트이지 1995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시 민간 위주로 진행되던 고구려 연구가 1995년부터 국가적 중점 연구로 전환된 것은 사실이다.
4) 북한이 유네스코에 신청한 유적은 모두 평양 언저리에 있는 유적이지 압록강 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적은 2001년에 새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이미 19세기 말부터 꾸준히 발굴해온 것이다.
5) 조공을 국내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보는 견해는 중국 학자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6) 중국이 주변국의 역사를 자기 역사라고 강변하는 것은 비단 고구려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놓은 논리가 바로 조공과 책봉이다.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가 705년간 계속 조공과 책봉을 해온 것처럼 주장한다. 조공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국 국민이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조공과 책봉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상호관계를 잇기 위해 주고받는 외교적 관례였다. 만일 조공과 책봉이라는 고대의 외교 관례를 갖고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포함한다면 신라, 백제, 고려, 조선, 왜, 일본, 월남, 터키 등의 역사도 중국 역사가 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705년 동안 하나의 나라로 지속된 반면, 같은 시기 중국은 35개의 나라가 이합집산을 했다는 점에서도 중국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중국 측 주장대로라면 소수민족인 고구려 지방정권은 705년이란 긴 세월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고, 중앙정부인 중원은 35개의 나라로 수없이 존망을 계속했다는 우스꽝스러운 논리가 형성되며, 그리고 고구려가 도대체 35개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의 지방정권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7) 9세기에 신라가 백제를 합병해 고려를 세웠다는 말은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또한 한족이 언제 만주를 완전히 자기 땅으로 만들었는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만주 땅은 당나라의 군현이 아니라 당나라 스스로 해동성국이라고 칭한 발해가 차지했다. 그리고 이어서 요, 금, 원, 명, 청, 만주국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가운데 명나라만이 한족 정권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중원족과는 다른 민족들이다. 명나라는 현재의 만주지역을 모두 차지하지도 못했다. 현재의 압록강 어귀 후산(虎山)과 콴뎬(寬甸), 카이위안(開原) 외에는 모두 새외(塞外·중국 북방의 만리장성 바깥)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 때는 명나라와 여진족이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그 여진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차지한다. 이민족이 중국을 차지하고 통치한 것은 청나라 때만이 아니라 원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요나라 때는 베이징까지 요나라 땅이었고, 금나라 때는 양쯔강 근처까지 금나라 땅이었던 것을 보면, 중국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민족의 통치에 신음했는지를 알 수 있다. 중국 한족이 만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의 일이다. 따라서 중국은 만주 땅에 대한 역사적 뿌리를 찾아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동북공정을 벌이는 가장 근본적 이유인 것이다. | |
홀본성의 오녀산성.
첫째, 국제학술대회가 끝난 뒤 한국 측은 중국 학자의 발언에 대해 어떠한 반박도 내놓지 못했다. 이렇듯 설득력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반박하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3주일쯤 지난 뒤 서울 공원에 중국 동북의 지안(集安)에서 출토된 두 점의 고구려 묘비를 복제해 전시하는 행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관했는데, 한국의 일반인들이 고구려 역사 논쟁에 얼마나 높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묘비 정면에는 원래대로 한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한글이 쓰여 있었다.
알다시피 한글은 11세기 한 고려인이 만든 것으로 900년이 채 안 되는 역사를 갖고 있다.9) 하지만 그 묘비는 비문에 서기 414년에 만들어졌다고 쓰여 있었다. 700년이 넘는 시간차가 난다. 이런 유물 복제품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역사유물을 곡해하여 자국민을 오도하는 수법은 한국인이 중국 학자와 논리적으로 논쟁할 방법이 없음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같다.10)둘째, 조선일보는 11월18일 한국 작곡가 나인영이 새로 작곡한 오페라 ‘아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에 대해 보도했다. 나인영은 “한민족의 영토를 넓히고 기상을 높인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음악으로 표현했다”고 밝혔다. 줄거리는 고구려가 연(燕)을 정복하고, 연나라는 고구려 호태왕을 주군으로 받들게 된다는 내용이다. 극작가 이영무는 “광개토대왕은 고토 회복을 위해 부단히 전쟁하고 정복한 인물”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역사 날조극이다. 요동은 (전국) 7웅(雄) 시기의 연나라로,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것은 세계가 공인한 역사다.
진시황이 연나라를 멸했는데, 어떻게 별안간 한국의 무대에서 고구려 왕이 연나라를 멸하는 것으로 뒤바뀔 수 있는가.11)일찍이 수천 년 동안 천하무적이었던 고대 제국도 몰락하여 100여년이 지나면 새롭게 나타난 강하고 권력 있는 국가들의 중상모략에 휘말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는 외교정책은 지극히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 것은 미 중앙정보국이 개입함에 따라 고구려 역사논쟁은 한국이 우리 동북 3성을 집어삼키려는 야심으로 변질됐고, 21세기 중국이 해체될 때 이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구려 역사논쟁에서 무기력하게 양보만 해오다 분쟁을 끝내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로써 나쁜 생각을 품은 한국인은 더욱 두려움이 없어졌다.
만일 한국 정부가 계속 국민들에게 ‘고구려는 한국 역사’라고 주입하고, 한국 매체들이 계속 목소리를 높여 ‘만주는 고대 한민족의 북방 영토였다’고 선전한다면, 한국 민중은 중국을 증오하게 되고 그들의 ‘옛 땅’을 되찾자는 것이 남북통일 이외에 또 하나의 민족적 숙원이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12) 이렇다면 중-한 관계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혹시 이것이 미 중앙정보국이 목적하는 바는 아니겠는가.
만주 괴뢰정부 시절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일본 놈들의 졸개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두 나쁜 놈(二鬼子)’이라고 불렸다. 이 ‘두 나쁜 놈’과 오늘날 한국 내에서 말하는
‘매국노(韓奸)’13)는 같은 부류다. 구세대 동북인들은
‘꼬리빵즈(高麗棒子)’14)라는 악명이 여기서 나왔다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상전의 도움을 받아 ‘꼬리빵즈’들이 다시 동북 3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일찍이 크고 작은 괴뢰들의 식민 노역을 겪을 대로 겪은 동북지방 동포들은 21세기에 또다시 ‘한국 괴뢰’의 새로운 식민 위협에 놓이게 될 것인가.15)필자는 정론가가 아니며 역사학자도 아니다. 해외에 사는 평범한 중국인(華人)일 뿐이다. 그저 우국충정으로 중국의 근황과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고, 중-한 간의 이번 고구려 역사 논쟁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나의 보잘것없는 생각이 다른 사람의 탁견을 끌어들이는 구실을 하기를 바란다.
8)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만주가 중국의 화하족(華夏族·한나라 때 많은 주변국을 정복해서 형성한 한족 이전의 종족)의 무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만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일컬었던 동이(東夷)란 말 자체가 ‘오랑캐’라고 비하해 부르는 말로 자기들과는 절대 같은 민족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최근 자신들이 비하하던 오랑캐까지 같은 민족으로 끌어들이는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역사적으로 취약한 중화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9) 한글은 1446년(세종 28) 조선시대에 창제됐다.
10) 광개토태왕비가 일부 한글로 쓰인 것처럼 하여 전시한 예는 없다. 아마 별도로 한글 설명을 덧붙였을 것이다. 한국인은 모두 광개토태왕비가 한문으로 쓰인 것을 안다. 하지만 비문이 한문이기 때문에 중국 것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영어로 된 비문이나 자료는 다 영국 것인가?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해주는 귀중한 증거다. 비문에는 고구려를 세운 추모(주몽)가 ‘하느님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새겨져 있다. 중국 역사에서 천자(天子)는 오로지 중원에 하나밖에 없다고 했다. 고구려는 당당한 천자 국가였다는 것을 광개토태왕비가 웅변해주고 있다.
11) 전국시대(기원전 475~기원전 221)의 연(燕)나라와는 별개로 5호16국 시대에 3개의 연나라가 있었는데, 보통 3연(3燕)이라고 한다. 모두 선비족이 세운 나라들인데 편의상 전연(前燕·349~370), 후연(後燕·384~408), 남연(南燕·398~410)으로 나눈다. 이들 나라는 고구려에 이웃해 있어 고구려와 자웅을 겨루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영락 17년(407)에 후연을 정벌해 이듬해 멸망시킨다(이 사실은 광개토태왕비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오페라에 고구려가 연나라를 정복했다는 내용은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12) 한국인에게 고구려가 한국 역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사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책으로 동북공정을 만들었을 때 분노한 것이다. ‘만주를 되찾기 위해’ 또는 ‘미국이 부추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중국은 고구려 역사 얘기만 나오면 곧바로 ‘만주 땅’을 들먹인다. 왜 그럴까? 이는 중국이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 역사적 정체성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13) 원래 중국에서는 매국노를 ‘한간(漢奸)’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매국노란 말을 한간(韓奸)이라고 쓴 것이다.
14)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우리를 ‘조센징(朝鮮人)’이라고 비하했고, 이는 당시 한국인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욕이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는 ‘꼬리빵즈(高麗棒子)’가 가장 큰 욕이었다. ‘빵즈(棒子)’란 ‘몽둥이’ ‘방망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욕을 만드는 접미사다. 따라서 문자대로 번역하면 ‘고려놈’ 또는 ‘고려쭛쭛’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고려’는 고구려를 지칭한다. 고려는 만주를 차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주의 많은 지명에 ‘고려’가 나오는데 모두 ‘고구려’를 일컫는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이 하는 ‘꼬리빵즈’라는 욕에는 한국인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인정한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셈이다.
15) 이 글을 쓴 사람은 중국 동북지방 사람이 분명하다. 다른 지방에서는 ‘꼬리빵즈’라는 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중 관계의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이런 말투에서도 한-중 두 나라를 이간질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