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병술년 벽두 재계의 최고 관심사였던 롯데쇼핑 상장에 대해 외신들은 이렇게 소개했다. 그에 걸맞게 2월2, 3일의 롯데쇼핑 공모주 청약에 몰린 자금은 11조원을 넘었다. 청약증거금만 5조2970억1680만원으로 국내 민간기업 공모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1999년 한국가스공사와 한국담배인삼공사(KT&G)가 민영화될 때 11조원 기록을 제외하고, 민간기업으로는 2002년 3월 기업공개된 LG카드의 4조5005억원이 최대 청약증거금이었다.
청약경쟁률도 77.04대 1로 매우 치열했다. 산술적으로 보면 5000주(20억원)를 청약하고 10억원을 청약증거금으로 낸 일반투자자가 겨우 64주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말 그대로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올 할인점 12개점 출점 ‘올인’
개인에게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롯데쇼핑 상장 주간사를 맡았던 대우증권에 따르면 수요 예측에 참가한 기관투자가만 무려 620개나 됐고, 이 가운데 509개 기관투자가는 공모가(40만원) 이상의 가격을 써냈다. 수요 예측에 참가한 기관투자가와 공모가 이상을 써내 물량을 확보한 기관투자가 수 역시 사상 최대였다.
상장을 성공리에 마친 롯데가 공모한 자금 3조7000억원을 어디에 쓸지도 재계의 관심사다. 이에 대해 롯데는 상장을 앞두고 실시한 기업설명회(IR)에서 공모자금 3조7000억원의 65%인 2조4200억원 정도를 할인점 관련 사업에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롯데가 할인점 분야에 목을 매는 이유는 숙명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신세계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롯데는 기업공개를 결정하면서 주간사인 대우증권에 “신세계보다 시가총액이 높도록 공모가를 받아달라”는 조건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만큼 롯데가 전통의 라이벌인 신세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얘기다.
할인점은 이마트를 앞세운 신세계가 1위를 지키고 있는 분야다. 반면 롯데의 할인점인 롯데마트는 삼성테스코의 홈플러스에도 밀려 업계 3위에 올라 있다. 수익성 측면에서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지난해 말 기준 롯데마트의 매출 총이익률은 21.2%로 이마트(22.8%)보다 낮고, 영업이익률은 3.0%로 이마트(7.5%)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유통업계 지존을 꿈꾸는 롯데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확고부동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백화점은 캐시카우(Cash Cow·확실히 돈벌이가 되는 상품이나 사업)로서 충분한 수익을 내고 있지만 성장성은 거의 없는 편이다. 이에 반해 할인점 사업은 신세계의 이마트가 보여줬듯이 성장성도 높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고위층을 중심으로 내부적으로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을 제외한 오프라인 유통 채널 가운데 할인점 사업이 가장 시장 전망이 밝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정도다.
롯데마트 서울역사점.
이와 함께 지방의 중소 할인점이나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할인점 인수설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롯데는 “가능성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게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롯데의 뒤집기가 가능하다고 보는 이들은 영업부지 선정이 중요한 백화점 사업과 달리 할인점은 판매 물건 구성에 따라 고객을 유도하기 쉽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소비자의 고정성이 약한 할인점 사업에서 롯데쇼핑이 2조4200억원에 이르는 공모자금을 활용할 경우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는 설명이다.
신 부회장 상장 과정 진두지휘
반면 비관적으로 보는 이들은 할인점 시장이 과포화 상태에 접어든 점을 지적한다. 이마트,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까르푸 등 할인점 업계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롯데가 롯데마트에 공모자금 대부분을 투자한다 해도 크게 달라질 상황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번에 롯데쇼핑 상장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이를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연관지어 보는 시각이 많다. 롯데쇼핑 상장설은 2000년 이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때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남의 돈 가지고 장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반면 차남인 신 부회장은 “상장을 통해 공격경영을 해야 한다”며 부친을 꾸준히 설득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 부회장은 82~88년 노무라증권 런던 지점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 덕분에 기업공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실제로 신 부회장은 사실상 모든 책임과 권한을 갖고 롯데쇼핑 상장 과정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은 아이디어 차원의 원칙만 제시했다는 것. 신 부회장은 또 올 1월 영국과 미국에서 열린 IR에 직접 참여해 외국인 투자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신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가 본격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움직임은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우선 롯데그룹은 1월17일 롯데쇼핑 등기임원을 17명에서 8명으로 줄이면서 신 회장의 장남 신동주 일본롯데 부사장과 딸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을 제외했다.
롯데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롯데쇼핑의 등기임원이 다른 상장사에 비해 많다는 지적이 있어 줄였을 뿐 큰 의미는 없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신 부회장의 위상이 높아지고, 후계 구도가 분명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신 부회장은 또 최근 코리아세븐에 이어 롯데닷컴 대표이사직도 사임했다. 이 역시 롯데쇼핑과 그룹 신사업에 매진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신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섬에 따라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었던 롯데의 기업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롯데의 기업문화에는 은둔자적인 성향이 강한 신격호 회장의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이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일도 많았다.
롯데쇼핑이 상장되면 기업 활동의 공개는 불가피하다. 신 부회장도 이를 의식한 듯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영 투명성은 높이고 불필요한 조직은 줄여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롯데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10명 규모의 IR팀을 신설하고, 매년 한 차례의 그룹 IR콘퍼런스를 포함해 연간 네 차례의 분기별 IR을 개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90년 초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경영수업을 시작한 신 부회장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다. 94년 인수한 편의점 업체 코리아세븐은 자본잠식에 들어가 계열사들이 지원했고, 2000년 설립한 롯데닷컴 역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 부회장이 선장이 될 롯데호의 미래가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