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중국 인터넷에 황당한 내용의 괴문서가 나돌고 있다는 사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됐다. “한국이 고구려사를 자기 역사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의 배경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국내 식자층은 대부분 이를 무시했다. 괴문서의 주장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신분도 밝히지 않는 상대에게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한반도 및 중국 동북지역의 상고사(上古史)를 연구하는 일부 전문가들은 그 문서가 지닌 잠재적 ‘폭발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문서를 찾아 번역하고 분석했다. 번역문은 인터넷 문서로는 꽤 긴 편인 A4 용지 13~14장 분량.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서길수 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서경대 교수)의 문서에 대한 ‘총평’이다.
“이 문서는 마치 중국 측의 주장에 한국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해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그릇된 신념을 중국인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중국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해 그동안 여러 국제회의에서 수많은 반론이 제기됐지만, 중국 측에 불리한 내용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같은 문서가 중국 인터넷에 확산될 때의 부작용은 매우 심각할 수 있다.”
서 교수는 “1월 초 중국 야후(Yahoo) 사이트에 들어가 문서 제목의 일부인 ‘중국해체 탄병만주(中國解體, 呑幷滿洲)’를 쳐 넣으니 검색 결과가 무려 600여 개나 나오더라”고 덧붙였다.
그릇된 역사인식 주입, 한국에 나쁜 감정 고조 예상
13억 중국 인구 중 인터넷 사용자는 대략 1억명이다. 이들 다수는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지식인 계층일 것이다. 그동안 중국 당국과 언론은 고구려사 귀속 문제를 둘러싼 한-중 간 논쟁을 자국민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한-중 간에 역사 논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이 문서는 그릇된 역사인식을 주입하고, 한국에 대한 나쁜 감정을 고조시킬 소지가 농후한 것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 문서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연계시켜 해석하고 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동북3성 지역의 상고사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로 2002년 시작된 이래 한-중 간 역사 논쟁을 촉발시킨 ‘주범’이다. 파문이 커지자 양국 정부는 2004년 8월 △교과서 등 정부 차원의 역사왜곡을 중단하고 △고구려사에 대한 양측 시각차가 정치문제로 번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학술교류를 통해 상호이해를 높이는 등
5개 항의 구두(口頭) 합의로 갈등을 봉합했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 후로도 줄기차게 역사왜곡 활동을 해왔음이 이번 문서로 드러났다는 것. 괴문서를 번역한 또 다른 고대사 전문가 A 박사의 말이다[이 분야 연구자 중 몇몇은 자신의 실명(實名)이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렸다. 중국을 자주 방문해야 하는 연구 성격상 향후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중국의 물밑 움직임이 치밀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번 괴문서의 경우 아주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에서부터 앞뒤가 안 맞는 것을 보면 역사학자가 쓴 글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한국 신문을 구독할 정도로 우리말을 잘하고, 시사에도 아주 밝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이런 사람이 엉뚱하게 미 CIA까지 끌어들여가면서 한국을 비난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잘 읽어야 한다. 고구려사가 어디에 귀속되느냐는 논란은 단순한 역사 논쟁이 아니라 중국의 장기 국가전략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의 B 박사도 ‘동북공정의 핵심은 정치에 있으며 정치적 목적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시각에 동의했다.
“동북공정은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나뉘어 매년 연구과제가 선정된다. 이중 학술 중심의 기초연구 과제는 인터넷에 공개되는 데 반해 응용연구 과제는 철저하게 비공개다. 남북통일 등 향후 한반도 정세 변화가 중국의 동북지역과 조선족 사회에 끼칠 영향에 대한 ‘민감한’ 내용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괴문서 중 “오늘의 북한 땅은 명(明)나라가 은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넘겨준 것”이라는 대목이 갖는 현대 정치적 함의를 B 박사는 이렇게 풀이했다.
“명나라가 시혜 차원에서 북한 땅을 넘겨줬다는 논리라면 훗날 북한에 긴급사태가 발생할 때 중국 군대가 북한에 진주할 명분이 강화된다. 물론 현 단계에서 중국의 이 같은 의도를 확인할 방도는 없다. 하지만 북한 상황이 유동적이고, 주한미군의 장래 입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중국으로선 이런 일에 대비할 필요를 느끼지 않겠는가.”
그러면 중국의 이 같은 역사왜곡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정부는 2004년 3월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시켰고, 재단은 그동안 70여 권의 학술서 발간, 학술회의 개최 등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하지만 일각에선 고구려연구재단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먼저 서길수 교수의 말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의 일차적 목적은 범국가 차원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정밀한 반박 논리를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단 설립 이전에 이미 고구려연구회가 10년 넘게 활동해오며 많은 연구 자료를 축적해왔음에도 재단은 기왕에 축적된 연구 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 점이 무척 아쉽다. 재단 운영과정에 기존 연구자들이 소외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세월 흐르면 중국 거짓 주장이 사실로 둔갑할 수도”
고구려연구재단이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의 가교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회의도 있다. 동북공정의 전방위적인 공격에 대응하려면 재단이 중심에 서서 학술연구와 대국민 홍보활동 등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중국이 정부와 학계 간의 유기적인 연계 하에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데 비해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고구려연구재단과 교육부, 외교부, 국가정보원 등 관련 정부기관 간의 협조체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국 동향을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처하려면 신속한 정보 입수가 필수다. 역사왜곡과 관련해 중국 동북지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중국 학계의 동향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제때에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정부는 재단 하나 설립해놓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격이다. 외교부나 교육부는 중국 현지에서 찾아야 할 간단한 자료까지 재단 측에 요구한다. 이래서야 본업인 대응논리 개발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고구려연구재단의 활동을 옆에서 지켜본 C 교수의 말이다. 학자 중심으로 구성된 재단에 ‘정보수집’까지 요구하고 있다는 것. C 교수는 또 “중국의 역사왜곡 논리를 반박하려면 언어학, 인류학적 접근도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장기적 국가전략 차원에서 역사문제를 다루기 위한 정부-민간 합동대책팀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에서 발간하는 ‘아시아 투모로우’지는 2004년 10월호에서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를 다룬 미국 알란 워치만 교수(국제정치학)의 칼럼을 실었다. ‘중국, 고구려사를 대만처럼’이라는 제목의 칼럼 일부분은 이렇다.
“중국은 과거 오랫동안 대만 영토를 독립된 지역으로 취급하다가(물론 지금은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 국제적으로 아무런 도전이나 해명 요구를 받지 않은 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이 고대 고구려 왕국에 대한 더욱 폭넓은 역사적 귀속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흐르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거짓 주장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만약 그런 일이 현실화될 때, 우리 학계와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지만 한반도 및 중국 동북지역의 상고사(上古史)를 연구하는 일부 전문가들은 그 문서가 지닌 잠재적 ‘폭발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문서를 찾아 번역하고 분석했다. 번역문은 인터넷 문서로는 꽤 긴 편인 A4 용지 13~14장 분량. 번역자 중 한 사람인 서길수 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서경대 교수)의 문서에 대한 ‘총평’이다.
“이 문서는 마치 중국 측의 주장에 한국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해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그릇된 신념을 중국인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중국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해 그동안 여러 국제회의에서 수많은 반론이 제기됐지만, 중국 측에 불리한 내용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같은 문서가 중국 인터넷에 확산될 때의 부작용은 매우 심각할 수 있다.”
서 교수는 “1월 초 중국 야후(Yahoo) 사이트에 들어가 문서 제목의 일부인 ‘중국해체 탄병만주(中國解體, 呑幷滿洲)’를 쳐 넣으니 검색 결과가 무려 600여 개나 나오더라”고 덧붙였다.
그릇된 역사인식 주입, 한국에 나쁜 감정 고조 예상
13억 중국 인구 중 인터넷 사용자는 대략 1억명이다. 이들 다수는 주로 도시에 거주하는 지식인 계층일 것이다. 그동안 중국 당국과 언론은 고구려사 귀속 문제를 둘러싼 한-중 간 논쟁을 자국민에게 일절 알리지 않았다. 따라서 한-중 간에 역사 논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이 문서는 그릇된 역사인식을 주입하고, 한국에 대한 나쁜 감정을 고조시킬 소지가 농후한 것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 문서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연계시켜 해석하고 있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중앙정부 차원에서 동북3성 지역의 상고사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로 2002년 시작된 이래 한-중 간 역사 논쟁을 촉발시킨 ‘주범’이다. 파문이 커지자 양국 정부는 2004년 8월 △교과서 등 정부 차원의 역사왜곡을 중단하고 △고구려사에 대한 양측 시각차가 정치문제로 번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학술교류를 통해 상호이해를 높이는 등
5개 항의 구두(口頭) 합의로 갈등을 봉합했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 후로도 줄기차게 역사왜곡 활동을 해왔음이 이번 문서로 드러났다는 것. 괴문서를 번역한 또 다른 고대사 전문가 A 박사의 말이다[이 분야 연구자 중 몇몇은 자신의 실명(實名)이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렸다. 중국을 자주 방문해야 하는 연구 성격상 향후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만큼 중국의 물밑 움직임이 치밀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은 고유의 풍습을 보존하며 정체성을 지켰다. 창바이현 싼두아오의 5일장 풍경.
고구려연구재단의 B 박사도 ‘동북공정의 핵심은 정치에 있으며 정치적 목적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시각에 동의했다.
“동북공정은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나뉘어 매년 연구과제가 선정된다. 이중 학술 중심의 기초연구 과제는 인터넷에 공개되는 데 반해 응용연구 과제는 철저하게 비공개다. 남북통일 등 향후 한반도 정세 변화가 중국의 동북지역과 조선족 사회에 끼칠 영향에 대한 ‘민감한’ 내용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괴문서 중 “오늘의 북한 땅은 명(明)나라가 은혜를 베푸는 차원에서 넘겨준 것”이라는 대목이 갖는 현대 정치적 함의를 B 박사는 이렇게 풀이했다.
“명나라가 시혜 차원에서 북한 땅을 넘겨줬다는 논리라면 훗날 북한에 긴급사태가 발생할 때 중국 군대가 북한에 진주할 명분이 강화된다. 물론 현 단계에서 중국의 이 같은 의도를 확인할 방도는 없다. 하지만 북한 상황이 유동적이고, 주한미군의 장래 입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중국으로선 이런 일에 대비할 필요를 느끼지 않겠는가.”
그러면 중국의 이 같은 역사왜곡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정부는 2004년 3월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시켰고, 재단은 그동안 70여 권의 학술서 발간, 학술회의 개최 등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하지만 일각에선 고구려연구재단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먼저 서길수 교수의 말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의 일차적 목적은 범국가 차원에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정밀한 반박 논리를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재단 설립 이전에 이미 고구려연구회가 10년 넘게 활동해오며 많은 연구 자료를 축적해왔음에도 재단은 기왕에 축적된 연구 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 점이 무척 아쉽다. 재단 운영과정에 기존 연구자들이 소외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세월 흐르면 중국 거짓 주장이 사실로 둔갑할 수도”
고구려연구재단이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의 가교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회의도 있다. 동북공정의 전방위적인 공격에 대응하려면 재단이 중심에 서서 학술연구와 대국민 홍보활동 등을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중국이 정부와 학계 간의 유기적인 연계 하에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데 비해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고구려연구재단과 교육부, 외교부, 국가정보원 등 관련 정부기관 간의 협조체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국 동향을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처하려면 신속한 정보 입수가 필수다. 역사왜곡과 관련해 중국 동북지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중국 학계의 동향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제때에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정부는 재단 하나 설립해놓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격이다. 외교부나 교육부는 중국 현지에서 찾아야 할 간단한 자료까지 재단 측에 요구한다. 이래서야 본업인 대응논리 개발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아시아담당 부부장.
싱가포르에서 발간하는 ‘아시아 투모로우’지는 2004년 10월호에서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를 다룬 미국 알란 워치만 교수(국제정치학)의 칼럼을 실었다. ‘중국, 고구려사를 대만처럼’이라는 제목의 칼럼 일부분은 이렇다.
“중국은 과거 오랫동안 대만 영토를 독립된 지역으로 취급하다가(물론 지금은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지금 국제적으로 아무런 도전이나 해명 요구를 받지 않은 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이 고대 고구려 왕국에 대한 더욱 폭넓은 역사적 귀속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흐르면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거짓 주장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만약 그런 일이 현실화될 때, 우리 학계와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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