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와 양복 외의 옷을 입어본 적 없는 중년 남성들이 패션에 눈뜨고 있다. 그러나 젊은 시절 즐겨 입던 청바지를 다시 꺼내 입는 것은 금물. 나이가 들수록 더 보수적으로 입고, 거기에 가장 트렌디한 팁을 더하는 것이 중년 남성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법이다.
할리데이비슨 코리아 이계웅 사장이 갤러리아 백화점 퍼스널 쇼퍼 룸 김미정 실장으로부터 2006년 봄 남성복 경향에 대한 어드바이스를 들었다. 좁은 통의 남성 바지가 강세지만, 중년 남성들에게는 보통 너비에 고급스런 소재를 쓴 디자인을 권한다.
그는 요즘 젊어 보이기 위해 물 빠진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아내가 사다준 빨간색 셔츠도 입고, 복잡한 체크무늬 셔츠도 나름대로 ‘코디’해서 입어본다. 아이들과 함께 캐주얼 브랜드 매장에 가서 커다란 프린트가 새겨진 박스 티셔츠를 사 입기도 했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숨기기 위해서다.
그러나 김 사장이 한껏 멋을 부린 옷차림은 다른 사람들한테서 호평을 얻지는 못한다. 그는 자신의 맞춤 양복이 대기업 임원이 된 친구들의 옷차림이나 후배들의 양복과 어딘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20년 넘게 아내가 사다주는 옷을 입었을 뿐 자신이 직접 사본 경험이 거의 없는 그의 패션 상식은 ‘청바지는 젊은 옷’, ‘원색을 입어야 젊어 보인다’, ‘헐렁한 옷은 배를 가려준다’ 정도다.
아내가 사다주는 대로 입던 습관 ‘이젠 사절’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패션브랜드 ‘타임’의 박승근 비주얼상품 수석팀장은 “오래 입어서 낡은 청바지와 물 빠진 청바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바지를 배꼽까지 끌어올려 입는 건 절대 금물입니다. 슈트 재킷은 박스형이 아니라 허리선이 들어가야 오히려 날씬해 보이죠. 회색이나 브라운을 ‘노색’이라고 생각하고 빨간색이 젊어 보인다고 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상식입니다. 원색은 탄탄하고 밝은 피부가 아니면 어울리기 어려운 반면, 브라운 컬러는 중·장년 남성의 로맨틱한 느낌을 돋보이게 합니다.”
6·25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나 70년대 통기타와 청년문화를 경험하고 현재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가 된 베이비붐 세대의 남성들은 패션에 대한 의식에서 앞뒤 세대와 큰 단절을 겪는다.
짙은 회색이나 쥐색 슈트는 보수적인 계층에서 성공적인 남성이라는 인상을 준다.
“우리 또래가 청바지를 좋아한 첫 세대일 겁니다. 서구 문화에 대한 초기적 선망이랄까요. 하지만 패션이란 개념은 없었고 옷 입는 법에 대해 교육받을 기회도 전혀 없었어요. 옷이란 아내가 사다주면 그냥 입는 것이었죠.”
청바지에 브라운색 니트를 멋지게 갖춰 입은 정범구(52) 전 국회의원의 말이다. 그는 독일 유학 시절 남자들의 ‘패션’에 대해 눈을 떴다고 말한다. 방송인인 그는 자신의 옷을 직접 구입하고 있는데 “‘메이커’와 ‘브랜드’를 보고 옷을 사는 젊은 세대의 생각에는 저항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옷 잘 입는 남자가 성공한다’ 새로운 시대의 새 명제
문제는 40대 후반~50대에 이른 남성들이 개성을 중시하고 상대적으로 다양한 패션 정보를 접하며 대학시절을 보낸 ‘세련된’ 후배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년 남성들이 ‘옷은 떨어질 때까지 입으라’는 아버지의 말씀과 ‘옷 잘 입는 남자가 성공한다’는 새로운 시대의 명제 사이에서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년 남성들은 옷을 너무 크게 입는 경향이 있다. LG패션의 알베로 등 각 브랜드의 최고급 라인에서는 모두 맞춤 양복을 만들어 소비자 욕구에 맞추고 있다.
세련된 옷차림에 대한 요구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미국의 1차 베이비붐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나 이제 60이 됐으며, 젊은 시절엔 히피 문화와 로큰롤에 열광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최근 미국의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들 베이비붐 세대가 옷장을 어떻게 ‘업데이트’할지 모른 채 젊어 보이려고만 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늙어 보이거나 바보처럼 보이곤 한다면서 ‘늙을수록 더 현명하고 더 트렌디하게(Older, wiser and trendier)’란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에 매장을 갖고 있는 뉴욕 브랜드 폴 스튜어트는 유행을 따르면서도 세련된 옷을 입고 싶어하는 중년 남성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옷들을 디자인한다. 전통을 고수하던 브룩스 브라더스조차 노년층을 위해 흰색이 아닌 연보라색 드레스셔츠나 허리선이 들어간 슈트를 판매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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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젊은 브랜드인 ‘유나이티드 애로우가’ 45~60세를 타깃으로 한 매장을 도쿄에 오픈했다. 일본에서도 중년 패션 시장의 규모는 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김현동 씨는 2004년 일본에 나타났던 ‘레옹족’의 한국 상륙이 멀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레옹’은 ‘젊은 여성에게 호감을 얻는 패션 연출법’ 등의 기사로 화제가 된 일본 중·장년 남성을 겨냥한 패션 잡지 이름이다.
남성이 ‘나이 들면서 더 현명하고 더 트렌디하게’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입는다는 것일까. 또 ‘유행을 따르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이란 무엇일까.
고객 개개인의 취향과 요구에 맞춰 스타일링을 만들어주는 갤러리아 백화점 퍼스널 쇼퍼 룸의 김미정 실장은 “최대 고객은 여성이 아니라 40대 후반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남성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옷과 구두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처럼 스타일링을 하기 어려운 고객층도 없다”고 말한다.
백화점도 경제력 갖춘 중년 남성 타깃 삼아
“패션에 대해 무관심하진 않지만 아내가 사다준 옷에 익숙해져 있거나 편하게 입는 스타일이 이미 굳어져버렸기 때문이죠. 세련된 옷차림을 원한다면 비싼 옷을 구입할 것이 아니라 다른 남성들이 무엇을 입는지, 자신과 무엇이 다른지 관심을 가져야 해요.”
김미정 실장과 톱스타들의 스타일리스트로 유명한 정윤기 씨가 중년 남성들에게 권하는 옷 입기 방법은 다음과 같다.
●실루엣과 피트(fit)
옷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실루엣이다. 재킷의 칼라, 어깨에서 허리와 바지로 이어지는 옷이 어떤 선을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편하다고 헐렁한 옷을 입으면 뚱뚱하고 둔해 보이므로 재킷은 남지 않게 입고, 허리선을 넣는다. 바지는 배꼽선 바로 아래에 맞춰 입는다. ‘배바지’를 입거나 유행한다고 밑위가 짧은 바지를 입으면 튀어나온 배와 빈약한 엉덩이가 강조될 뿐이다. 바지 앞선의 길이는 발등에 닿게, 뒷선은 이보다 1.5cm 길게 입는다. 둘로 나뉜 재킷 칼라에서 앞 칼라가 길어지는 추세로 이런 디자인이 젊어 보인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원 버튼 재킷은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잘 어울린다. 올해 출시된 남성복 바지통은 더욱 좁아졌는데 중년 남성들에겐 잘 어울리지 않으므로 피하는 게 좋고, 허리에 주름 넣은 바지도 입지 말 것.
중년 남성들이 옷을 못 입는 가장 큰 원인은 아내가 사다주는 옷을 ‘생각 없이’ 입기 때문. 편안한 옷에 익숙해지면 긴장감이 떨어지고 자세와 체형도 나빠진다. 흰 양말, 고무창 구두, 복잡한 색과 소재의 조합, 배바지 모두 금물이다.
셔츠도 크게 입지 않아야 한다. 목둘레는 손가락 두 개 정도가 들어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좋다. 칼라가 다소 높은 셔츠로 목의 주름을 가린다. 소매길이는 손목뼈를 약간 넘는 정도가 좋고, 재킷 소매는 이보다 4cm 짧게 만든다. 올해 명품 브랜드에서는 작은 자가드 무늬나 요철을 넣은 셔츠를 많이 내놓았지만, 피부가 희고 깨끗한 사람이 어울린다.
넥타이는 남자의 옷차림에서 가장 중요한 소품이므로 비싸더라도 실크 소재를 추천한다. 최근엔 스트라이프 셔츠에 사선 무늬의 ‘렙’ 타이를 맞추는 것이 유행인데 매우 세련돼 보일 수 있다.
●안경과 신발
젊은층에서는 큰 사이즈의 안경과 선글라스가 여전히 인기지만 중년 남성들에겐 작은 렌즈가 젊어 보인다. 무테나 가느다란 티타늄 소재의 안경테를 고른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만난 사람의 눈을 본 뒤 구두를 본다는 통계가 있으므로 구두 굽은 닳지 않게 관리한다. 구두는 고무가 아닌 가죽 밑창을 댄 것을 신되 ‘광’을 내지 말 것. 중년층에 가장 어울리는 컬러는 브라운.
●색깔
중년 남성에게 잘 어울리는 색상은 검정이나 슈트는 짙은 감색(진남색)·쥐색 등 전통적으로 점잖다고 생각하는 색깔이 세련돼 보인다.
옷을 잘 입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다양한 실험과 경험을 통해 어떤 옷을 입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호감을 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 중년 남성들이 가장 자주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는 역설적으로 전문가의 조언이나 ‘이미지 컨설턴트’의 충고 등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최신 유행의 비싼 명품을 입으면서도 ‘촌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패셔니스트인 할리데이비슨 코리아 이계웅 사장은 “나이 든 남성이 유행이나 트렌드에 너무 민감하게 옷을 입다 보면 경박해지기 쉽다”면서 “백화점 등의 판매사원들은 무조건 유행하는 옷을 입으라고 한다. 그러면 젊어 보인다는 것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사장은 청바지를 좋아하는데 10여 벌이 넘는 청바지들의 차이를 알고 입는 편이 옷에 대한 감각을 얻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이제 중년의 남자가 거울 앞에서 결정할 때다. 옷에 맞춰 나를 바꿀 것인가, 나의 늘어진 뱃살에 맞춰 옷을 고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