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파가 마트에서 우유를 골라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영화 ‘철의 여인’의 첫 장면에서 관객은 누구의 얼굴을 볼까. 촌부가 된 전직 여성 총리일까, 치매 걸린 ‘철의 여인’일까, 아니면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일까,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여성 정치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시들지 않은 신자유주의의 영혼일까.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1979년에서 90년까지 11년간 집권. 노조를 영국병의 근원으로 본 강성 보수주의자. 전후(戰後) 복지 자본주의 모델인 케인스주의와 결별하고 복지 축소,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를 과감하게 밀어붙인 시장 근본주의자. 영국병을 치유하고 나라를 다시 강대국 지위에 올려놓은 영웅. 많은 젊은이를 실업과 마약, 알코올의 늪에 빠뜨린 악녀.
마거릿 대처의 전기 영화를 만든다는 기획이 얼마나 많은 논란과 비난에 맞서야 했을까. 미국의 오랜 민주당 지지자인 메릴 스트리프가 영국 보수주의의 상징인 대처를 연기한 ‘철의 여인’은 일단 영리하다. 보여주고 들려주되 심판하지 않는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여성의 얼굴과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회한, 망상에 빠진 늙은 노인의 모습을 겹쳐놓으며 한 인간이 걸어온 삶의 여정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해낸다. 대처의 과거와 현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그의 신념에 찬 발언을 육성으로 들려주되 판단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철의 여인’
그렇게 100여 분의 러닝타임이 끝난 후 뇌리에 남은 것은 ‘철의 여인’이자 강력하게 군림했던 ‘아버지의 초상’이다. 아마도 관객은 스트리프가 분한 대처의 모습에서 오로지 ‘가족과 가문을 위해’ 세상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아버지의 쓸쓸한 은퇴 이후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또한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웠고, 세상의 유일한 진리처럼 믿고 따랐으며, 자식에게도 수없이 되뇌었던 ‘가족과 가문을 위한 삶’이 과연 자식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철의 여인’이 나오기 전까지 스크린은 대처보다 그가 버린 ‘탕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리노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대처 집권기인 1980년대에 파업을 벌인 탄광부들이다. 영화 ‘브래스트 오프’에선 탄광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밴드를 만든다. 실직한 철강 노동자들은 ‘풀 몬티’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고 춤을 춘다. 춤과 노래로 위안하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하고 위험했다.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의 주인공 소년은 포클랜드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영국 사회 전반에 몰아친 애국주의와 보수주의 물결에 휩쓸려 무심코 인종차별 범죄에 가담한다. 이 모든 일이 대처 시대 11년간 벌어졌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대처리즘에 무정부주의를 내세운 테러리스트의 폭탄을 꽂는다. 영화 원작이 된 앨런 무어의 만화는 1982년 첫선을 보였는데, 당시 “대처리즘에 대한 리액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불행한 자식들을 낳은 대처는 말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다시 ‘철의 여인’으로 돌아가자. 마트에서 우유를 사가지고 돌아온 대처는 남편 데니스 대처와 일상적인 아침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말 없이 나가셨다. 요새 약도 드시지 않는다”며 딸과 가족이 수군수군 걱정하는 모습에서 영화는 대처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암시한다. 알츠하이머병 증세가 이미 시작된 대처는 남편의 망령, 즉 자신의 머릿속 환영과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대처가 정계를 완전히 떠난 지 10여 년 만인 2003년 남편 데니스 대처 경은 사망했으며, 대처의 알츠하이머병은 2008년 딸이 처음 알렸다. 영화는 장례 직후 대처가 남편 유품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완벽한 재현’ 메릴 스트리프 연기 주목
대처는 잘 알려진 것처럼 식료품점 딸이었다. 아버지는 링컨셔의 소도시이자 상가 밀집지역인 그랜섬에서 시장과 구청장을 지내는 등 지역 정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소녀 대처는 아버지가 정치회합이나 소상공인모임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정치적 야망을 키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쟤는 오늘도 공부만 한다지?”라며 손가락질한 뒤 놀러나가는 또래 소녀들과 그들을 지켜만 보는 소녀 대처의 모습은 현재의 대처를 거듭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 이미지를 반복해 보여주면서 대처의 삶이 출발부터 여느 여성과 달랐다는 점을 강조한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대처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유일한 여성 후보로 다트퍼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보수 진영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주목받았고, 이후 사업가인 데니스로부터 프러포즈를 받는다. “이제까지는 식료품점 딸이었지만 성공한 사업가와 결혼하면 정치인으로서의 당신 삶은 달라질 것”이라는 구혼의 변도 남다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대답 또한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다. “주방에 틀어박혀 설거지나 하며 살 수는 없어요. 요리, 청소 말고도 의미 있는 일이 있어요.” 정치인으로서의 야심을 밝히고 예비 남편의 적극적인 외조를 약속 받는다.
“남에게 휘둘리며 살아선 안 된다”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은 없다” “나는 남자들과 대화하는 게 더 편하다” “요새 정치인들은 사상이나 이념보다 기분에 따라 정치한다” “지금 총리는 너무 달콤하고 매끄러운 말만 한다” “소신을 따르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등 남성보다 더 강경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대사를 끊임없이 반복, 변주한다. 영화는 대처의 정계 입문 시절부터 교육부 장관을 거쳐 보수당 당수이자 최초로 여성 총리 자리에 오르고, 강경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몰아붙이며 영국 사회에 논쟁을 몰고 온 후 마침내 사임하기까지의 시간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때론 자료화면을 동원해 전후 최악의 파업과 실업, 빈부격차, 긴축예산에 항의하는 시위 장면도 보여준다. 1984년 북아일랜드 해방군(IRA)에 의한 테러, 1982년 아르헨티나와 치른 포클랜드전쟁에 대한 강경대응도 꽤 비중 있게 다룬다. 어떤 희생이나 손해를 치르더라도 ‘국익’을 위협하는 사람과는 협상하지 않고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그의 강철 같은 믿음과 행동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대처는 남편의 유품을 다 정리하고,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 후에야 비로소 남편의 망령을 놓아준다. 울면서 뒤따르는 어린 아들을 내치고 야심만만한 표정으로 국회에 첫 등원하던 여인. 총리에 도전하면서 “과연 당신의 삶 속에 남편과 자식들의 존재는 있기나 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던 아내이자 어머니. 회한에 젖은 노년의 대처는 남편에게 묻는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을 뿐이에요. 우리의 아이들이 진정 행복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당신도 행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했어요. 진실을 말해봐요. 당신, 행복했나요?”
국가와 국민과 당을 위해 살아온 위대한 정치인. 여성의 삶을 거부했던 위대한 여성. 하지만 누구를 위한 ‘강한 나라’였고,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으며, 누구를 위한 경제 발전이었을까. 과연 국민은 행복했을까.
현재와 과거가 한 번씩 교차하는 영화 형식, 그리고 ‘강한 여인’을 강조하는 어조는 다소 단조롭지만, 특유의 외모부터 ‘앵앵거리는’ 목소리까지 대처를 완벽하게 재현한 메릴 스트리프의 연기는 단연 최고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1979년에서 90년까지 11년간 집권. 노조를 영국병의 근원으로 본 강성 보수주의자. 전후(戰後) 복지 자본주의 모델인 케인스주의와 결별하고 복지 축소,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를 과감하게 밀어붙인 시장 근본주의자. 영국병을 치유하고 나라를 다시 강대국 지위에 올려놓은 영웅. 많은 젊은이를 실업과 마약, 알코올의 늪에 빠뜨린 악녀.
마거릿 대처의 전기 영화를 만든다는 기획이 얼마나 많은 논란과 비난에 맞서야 했을까. 미국의 오랜 민주당 지지자인 메릴 스트리프가 영국 보수주의의 상징인 대처를 연기한 ‘철의 여인’은 일단 영리하다. 보여주고 들려주되 심판하지 않는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여성의 얼굴과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회한, 망상에 빠진 늙은 노인의 모습을 겹쳐놓으며 한 인간이 걸어온 삶의 여정 속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해낸다. 대처의 과거와 현재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그의 신념에 찬 발언을 육성으로 들려주되 판단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철의 여인’
그렇게 100여 분의 러닝타임이 끝난 후 뇌리에 남은 것은 ‘철의 여인’이자 강력하게 군림했던 ‘아버지의 초상’이다. 아마도 관객은 스트리프가 분한 대처의 모습에서 오로지 ‘가족과 가문을 위해’ 세상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아버지의 쓸쓸한 은퇴 이후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또한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웠고, 세상의 유일한 진리처럼 믿고 따랐으며, 자식에게도 수없이 되뇌었던 ‘가족과 가문을 위한 삶’이 과연 자식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철의 여인’이 나오기 전까지 스크린은 대처보다 그가 버린 ‘탕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리노 빌리의 아버지와 형은 대처 집권기인 1980년대에 파업을 벌인 탄광부들이다. 영화 ‘브래스트 오프’에선 탄광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밴드를 만든다. 실직한 철강 노동자들은 ‘풀 몬티’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고 춤을 춘다. 춤과 노래로 위안하기엔 현실이 너무 팍팍하고 위험했다.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의 주인공 소년은 포클랜드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영국 사회 전반에 몰아친 애국주의와 보수주의 물결에 휩쓸려 무심코 인종차별 범죄에 가담한다. 이 모든 일이 대처 시대 11년간 벌어졌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대처리즘에 무정부주의를 내세운 테러리스트의 폭탄을 꽂는다. 영화 원작이 된 앨런 무어의 만화는 1982년 첫선을 보였는데, 당시 “대처리즘에 대한 리액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불행한 자식들을 낳은 대처는 말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다시 ‘철의 여인’으로 돌아가자. 마트에서 우유를 사가지고 돌아온 대처는 남편 데니스 대처와 일상적인 아침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말 없이 나가셨다. 요새 약도 드시지 않는다”며 딸과 가족이 수군수군 걱정하는 모습에서 영화는 대처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암시한다. 알츠하이머병 증세가 이미 시작된 대처는 남편의 망령, 즉 자신의 머릿속 환영과 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대처가 정계를 완전히 떠난 지 10여 년 만인 2003년 남편 데니스 대처 경은 사망했으며, 대처의 알츠하이머병은 2008년 딸이 처음 알렸다. 영화는 장례 직후 대처가 남편 유품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완벽한 재현’ 메릴 스트리프 연기 주목
대처는 잘 알려진 것처럼 식료품점 딸이었다. 아버지는 링컨셔의 소도시이자 상가 밀집지역인 그랜섬에서 시장과 구청장을 지내는 등 지역 정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영화에서 소녀 대처는 아버지가 정치회합이나 소상공인모임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정치적 야망을 키우는 것으로 묘사된다. “쟤는 오늘도 공부만 한다지?”라며 손가락질한 뒤 놀러나가는 또래 소녀들과 그들을 지켜만 보는 소녀 대처의 모습은 현재의 대처를 거듭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 이미지를 반복해 보여주면서 대처의 삶이 출발부터 여느 여성과 달랐다는 점을 강조한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대처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유일한 여성 후보로 다트퍼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보수 진영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주목받았고, 이후 사업가인 데니스로부터 프러포즈를 받는다. “이제까지는 식료품점 딸이었지만 성공한 사업가와 결혼하면 정치인으로서의 당신 삶은 달라질 것”이라는 구혼의 변도 남다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대답 또한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다. “주방에 틀어박혀 설거지나 하며 살 수는 없어요. 요리, 청소 말고도 의미 있는 일이 있어요.” 정치인으로서의 야심을 밝히고 예비 남편의 적극적인 외조를 약속 받는다.
“남에게 휘둘리며 살아선 안 된다”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은 없다” “나는 남자들과 대화하는 게 더 편하다” “요새 정치인들은 사상이나 이념보다 기분에 따라 정치한다” “지금 총리는 너무 달콤하고 매끄러운 말만 한다” “소신을 따르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등 남성보다 더 강경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대사를 끊임없이 반복, 변주한다. 영화는 대처의 정계 입문 시절부터 교육부 장관을 거쳐 보수당 당수이자 최초로 여성 총리 자리에 오르고, 강경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몰아붙이며 영국 사회에 논쟁을 몰고 온 후 마침내 사임하기까지의 시간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때론 자료화면을 동원해 전후 최악의 파업과 실업, 빈부격차, 긴축예산에 항의하는 시위 장면도 보여준다. 1984년 북아일랜드 해방군(IRA)에 의한 테러, 1982년 아르헨티나와 치른 포클랜드전쟁에 대한 강경대응도 꽤 비중 있게 다룬다. 어떤 희생이나 손해를 치르더라도 ‘국익’을 위협하는 사람과는 협상하지 않고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그의 강철 같은 믿음과 행동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대처는 남편의 유품을 다 정리하고, 파란만장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 후에야 비로소 남편의 망령을 놓아준다. 울면서 뒤따르는 어린 아들을 내치고 야심만만한 표정으로 국회에 첫 등원하던 여인. 총리에 도전하면서 “과연 당신의 삶 속에 남편과 자식들의 존재는 있기나 한 것이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던 아내이자 어머니. 회한에 젖은 노년의 대처는 남편에게 묻는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을 뿐이에요. 우리의 아이들이 진정 행복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당신도 행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했어요. 진실을 말해봐요. 당신, 행복했나요?”
국가와 국민과 당을 위해 살아온 위대한 정치인. 여성의 삶을 거부했던 위대한 여성. 하지만 누구를 위한 ‘강한 나라’였고,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으며, 누구를 위한 경제 발전이었을까. 과연 국민은 행복했을까.
현재와 과거가 한 번씩 교차하는 영화 형식, 그리고 ‘강한 여인’을 강조하는 어조는 다소 단조롭지만, 특유의 외모부터 ‘앵앵거리는’ 목소리까지 대처를 완벽하게 재현한 메릴 스트리프의 연기는 단연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