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원천인 커피체리를 딴 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현지인들.
커피 생산지 순례 ‘자바 트레커’의 길
수도 포트모르즈비에서 일박하고 이 나라의 커피 생산지이자 물류센터가 몰려 있는 고로카로 향했다. 프로펠러 경비행기를 탄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인 딘 사이컨이 2004년 고로카 등을 방문하고 기록한 역작 ‘자바 트레커’가 떠올라서였다.
“포트모르즈비에서 고로카로 가는 에어 뉴기니 701편에는 승객 12명이 탔다. 낡디낡은 프로펠러 비행기는 울창한 산림지역 상공을 덜거덕거리고, 딸꾹질하고, 때로는 상하좌우로 요동치며 날았다.”
사이컨은 미국 매사추세츠의 유기농 커피 로스팅 회사 딘스 번스의 창립자이자 소유주다. 그는 대안 무역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 커피 생산자와 수익을 공유하면서 지역 개발은 물론, 농부의 협동조합 결성을 지원한다. 그는 1987년부터 자바 트레커(Java trekker)의 길을 걷는다. 자바란 커피가 많이 나오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지명에서 따온 것이며, 트레커란 길고 고된 여행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커피 생산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순례자란 뜻이다.
아무튼 7년의 세월이 흘러서인지 프로펠러 비행기의 몸집은 40~50인승으로 불었고, 새 옷을 갈아입은 듯 깔끔하고 단정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 큰 섬이라는 뉴기니의 품은 한없이 크고 넓었다. 상하좌우로 요동치지 않는 1시간의 편안한 비행 끝에 낯선 작은 도시 고로카에 도착했다.
인구 10만 명의 도시라고 했는데 막상 보니 도시라기보다 작은 마을이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사람이 무리 지어 어딘가를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남자는 운동화를, 여자는 발이 송두리째 드러난 슬리퍼를 주로 신었고, 아이들은 아예 맨발이었다. 파푸아뉴기니는 산과 들에 먹을 것이 많아 굶주리는 사람이 없다지만, 남루한 옷차림으로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커피 생산의 핵심 고로카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대부분 입술은 물론 입안까지 온통 빨갛다는 사실이다. 빈랑나무 열매인 브아이 때문이다. 파푸아뉴기니 사람은 마약의 일종인 브아이를 습관적으로 껌처럼 씹는다. 현지인은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브아이를 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수출회사 게포(GEPO)커피 (대표 박복식)의 현지 직원 오왈에(37)가 필자에게 브아이를 씹어보라고 권했으나 손사래로 대신했다.
고로카 지역은 산하가 아름답고 깨끗했다. 높은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계곡물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을 그대로 마셔도 탈이 없었다. 특이한 점은 온 천지가 커피 농장이라는 것. 말 그대로 ‘커피 천국’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커피 천국. 여기서는 어린아이가 농장에서 놀며 커피체리를 따먹는다. 그러고 그 속에 든 커피콩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엄마 손에 쥐어준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코흘리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현지인들이 파치먼트 자루 더미에 올라 환호하고 있다.
우리는 밭에 나가 커피를 따네
이렇게 우리는 가족을 먹여 살린다네.”
“우리는 커피의 어머니들이라네.”
커피 축제 때 남녀가 주고받는 커피 노래의 일부다. 가난한 파푸아뉴기니 사람에게는 커피가 중요한 생명의 열매다. 필자는 평소 무심코 커피 향을 즐기기만 했다. 커피 한 잔에 서린 가난한 원주민의 고난과 애환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파푸아뉴기니의 커피 농장 탐방은 커피 겉모습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까지도 이해하는 배움의 길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로카 지역의 커피 농장은 대부분 수확이 끝나 있었다. 그래서 다음 날 이른 아침 동(東)하일랜드에 있는 카이난 지역의 하기 농장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리면 두 시간에 주파할 수 있다고 했다.
치안 불안이 여행 걸림돌
이 나라 유일의 고속도로인 2차선 도로는 고로카를 중심으로 마운트 하겐과 레이 항을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축이다. 하지만 도로 곳곳은 폭우 탓에 한 가닥 숨을 이어가는 중환자 같은 곳이 많았고, 계곡을 지날 때마다 맞닥뜨리는 교량은 겨우 차 한 대 지날 수 있는 외나무다리였다. 동하일랜드의 헹가노피에 다다를 무렵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해 차를 세웠다. 원주민이 어떻게 사는지, 커피 열매는 어떻게 말리는지 직접 관찰해보고 싶었다. 도로 아래 계곡에서 커피콩을 씻는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 그들은 도로변 길바닥에서 커피콩, 즉 파치먼트(parchment)를 말리는 중이었다.
리더 격인 나이 많은 사람의 명령에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사람들이 일제히 작업에 임했다. 불과 10분 만에 취재와 사진 촬영을 끝냈다. 그들은 모델료를 달라고 졸랐다. 박복식 대표가 20키나(8600원)를 기부(?)하고 에너지 넘치는 그들과 작별을 고했다.
실제로 헹가노피를 지날 때는 대낮인데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차가 다리를 건널 무렵 몇 사람이 차체에 발길질을 했다. 떼강도가 가장 많은 곳으로 소문 난 지역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강도는 대부분 총을 들었습니다. M16 등 자동화기도 들었죠. 돈을 목적으로 하지만,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지인 가이드 에디(21)의 말에 등골이 오싹했다. 이 지역을 빨리 통과해야 하는데 차가 속도를 내지 못했다. 굽이굽이 산길과 만났기 때문이다. 겨우 바롤라 산 정상에 올라 차를 멈추고 잠시 자연이 내품는 향기를 맛보았다. 경찰 초소가 있었으나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을 것 같은 높은 곳에도 움막 같은 원시의 집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하기 농장의 주인인 브르스(40)와 카이난 마을 입구에서 만났다. 커피 농장으로 가는 길은 잘 다져놓은 듯했지만, 차는 창자가 뒤틀릴 정도로 뒤뚱거렸다. 농장에 다다르자 그동안의 고통이 눈 녹듯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빨갛게 농익은 커피체리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기 때문이다. 이곳 농장에서는 주로 남자 인부가 작업한다.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이 농장을 운영하는 브르스는 자신의 농장과 커피 맛을 이렇게 자랑했다.
“우리 농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30ha(9만 평) 정도죠. 하지만 아라비카종 티피카(블루마운틴)의 풍부한 아로마와 과육, 고급스러운 신맛과 부드러운 단맛이 조화를 이룬 점이 특징입니다. 달콤한 꽃향기의 뛰어난 후미(後味)에 반한 사람이 우리 커피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커피나무의 종류, 이파리 크기와 색깔, 줄기 형태, 커피 가공 작업 및 공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농장에서 수확한 커피체리는 곧바로 펄핑(pulping, 체리 껍질을 벗기는 작업) 장소로 옮겨진다. 반자동식 발전기가 꿀꺽꿀꺽 돌아가자 빨간색 체리 껍질과 끈적거리는 액체에 둘러싸인 파치먼트가 양 갈래로 쏟아져나왔다. 파치먼트는 젖은 상태로 자루에 담아 24시간 숙성한 후 자연 건조장으로 옮긴다.
1 커피체리를 따는 여인. 2 고로카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여인들.
농장 한쪽에서 건조 작업을 하던 인부들의 손놀림이 갑자기 빨라졌다. 푸른 하늘의 솜털 같은 뭉게구름이 먹구름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고산지대의 날씨는 정말 예측할 수 없었다. 장대비가 쏟아지자 인부들이 파치먼트 자루를 메고 혼비백산 움막으로 사라졌다. 참으로 의미 있는 커피농장 방문이었다.
농장 방문 후 돌아오는 길에 고로카 시장에 들렀다. 고로카 시장에는 남녀노소가 물결처럼 넘쳐났다. 온갖 채소와 이름 모를 과일, 그리고 생필품이 즐비했다. 평일에는 1500~2000명, 주말에는 2500~3000명이 운집한다고 했다. 장관인 것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파치먼트였다. 장터에서 파치먼트를 파는 사람은 소위 중간 상인이다. 필자가 용기를 내 인파 속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현지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일제히 몰려들었다. 필자를 파치먼트 매입자로 착각하고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차이가 없었다. 파치먼트 자루는 하얀색이었다. 하얀색 자루 더미에 높이 올라가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공장에서 이 파치먼트를 사가 크기와 품질에 따라 엄격하게 선별하면 다시 그린 빈으로 탄생한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이 그린 빈의 품질 상태를 점검한다. 이처럼 커피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의 원시적인 손길과 과학적인 공정이 어우러져 소비자에게 온다. 그래서 명품 커피의 길은 멀고도 멀다.
“흙 속의 원두 씨앗에서부터 커피 잔에 담기기까지 기나긴 여정을 거치면서 잘못될 수 있는 위험이 너무 많다”는 스타벅스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의 말을 되새기며 발길을 돌렸다.
“열대지방에서는 밤이 빠르게 다가온다. 지나간 낮의 흔적을 더듬어볼 여유도 없이 순식간에 어둠에 묻힌다는 것이다.”
1990년 초 파푸아뉴기니의 내전을 배경으로 한 로리드 존스의 소설 ‘미스터 핍’의 한 대목처럼 열대의 밤이 빠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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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상인은 동국대 행정학과와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 팬택 계열 기획홍보실장(전무)을 역임했다.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홍보 머리로 뛰어라’ ‘현해탄 波高 저편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