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모습의 온릉 전경.
단경왕후 신씨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가 고모와 아버지, 삼촌 등이 연산군 폐위 때 축출되고 사사돼 왕비 생활 7일 만에 폐비됐다.
단경왕후는 1487년(성종 18) 1월 15일 익창부원군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태어나 13세인 1499년(연산 5)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려 부부인으로 봉해졌다. 단경왕후는 10대 임금 연산군 비 신씨의 외질녀다. 즉 연산군의 비는 단경왕후의 고모이며, 연산군과 남편 중종은 배다른 형제이니 사가에서는 고모와 조카이고 왕실에서는 동서지간이다.
1506년 9월 2일 지중추부사 박원종과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주동이 돼 선왕인 연산군을 폐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바로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든 중종반정이다. 반정 주모자 박원종은 연산의 신임이 두터워 도부승지, 좌부승지, 경기관찰사 등을 거치며 국가의 재정을 주로 맡았다. 그러나 그는 왕 서열 1위였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부인(연산에게 큰어머니)인 자신의 누이를 연산군이 궁으로 불러들여 많은 배려를 하는 과정에서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연산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이후 박원종은 관직에서 쫓겨났다.
거사 당일 연산군은 경기도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하고 있었다. 폭정과 방탕한 생활에 젖어 있던 연산은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이날 정적들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연산은 장단 나들이를 취소했으나 이미 유순정과 신윤무, 장정, 박영문 등이 거사에 동조하면서 반정은 쉽게 이루어졌다. 한편 단경왕후가 되는 신씨는 이날 아버지 신수근과 작은아버지 신수겸이 제거되고, 친정 형제들은 멀리 귀양 보내진 것을 몰랐다.
박원종은 거사 직전 연산의 매부이며 진성대군(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을 찾아갔다. 신수근은 당시 연산의 총애를 받는 실권자였다.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한지를 물었다. 이 물음의 의미를 알아챈 신수근은 버럭 화를 내며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것 없다”고 못 박았다. 이 한마디로 신수근은 거사 당일 제거되고, 단경왕후는 죄인의 딸로서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박원종 일파의 주장으로 7일간의 왕비 생활을 거두고 사가로 쫓겨났다. 신하들이 단경왕후의 중전 불가론을 주장할 때 중종은 조강지처 이론을 내세워 반대하나 종사의 대계 논리에 밀려 결국 궁궐에서 내쳐졌다. 이날이 9월 9일이다. 다음 날 예조에서는 서둘러 새 중전의 간택에 들어갔다. 그가 바로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윤씨가 1515년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승하하자, 담양부사 박상(朴祥) 등의 상소로 단경왕후 복위 논의가 있었으나 중종반정 세력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폐비된 단경왕후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다.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궁궐의 누각에 올라 그녀의 본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씨 집에서는 뒷동산에 있는 바위에 신씨가 궁중에서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았다. 중종은 이 분홍색 치마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병환이 위급해지자 신씨(단경왕후)를 궁궐로 불러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승하했다.
1 온릉의 제향공간으로 좌청룡수가 흐르도록 한 은구(배수구)가 있다. 이는 자연친화적인 온릉만의 특색이다.2 온릉의 석호는 귀엽고 아담한 온화한 호랑이다.
궁궐을 떠나 49년간 사가에서 외롭게 한평생을 보낸 폐비 신씨는 1557년(명종 12) 12월 7일 소생 없이 71세로 승하했으며, 친정 묘역 언덕에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모셔졌다. 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수근의 후손이 봉사하다 1698년(숙종 24) 왕비추복상소(王妃追復上疏)가 있었으나, 묘당의 이론이 맞지 않는다 하여 예조에 명해 연경궁지에 사당을 세우게 했다. 이후 1739년(영조 15) 3월 28일 영조가 익호를 단경(端敬), 능호를 온릉(溫陵)으로 추봉하고 새롭게 상설을 설치했다. 능침의 상설은 추봉된 왕비릉인 태조 계비 신덕왕후 정릉(貞陵), 단종의 장릉(莊陵)과 단종 비 사릉(思陵)을 따랐다.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하고 나머지 상설제도는 그대로 따른 형식이다. 1807년 순조 7년 4월에 표석을 설치했다.
온릉의 정자각은 익공식(翼工式)의 맞배지붕으로, 산릉제례(山陵祭禮)를 올리는 장소다. 정자 모양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2칸의 구조를 갖는 것이 보통이다. 비각은 정자각 동쪽에 위치, 비문을 통해 이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내부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단경왕후 온릉(朝鮮國 端敬王后 溫陵)’이라 음각돼 있으며, 1807년 순조 7년 4월에 대리석으로 제작한 것이다.
상계의 봉분 주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으며 곡장 내에 석양과 석호 1쌍이 봉분을 수호하고 있다. 무석인도 생략해 없고 문석인만 한 쌍 있다. 이는 추봉(追封) 비릉(妃陵)의 예에 따라 능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능원은 능침 하계의 좌측 하단에 산신석을 놓아 3년간 제사의 예를 갖추고, 사가 묘역에서는 좌측 묘지 상단에 산신석을 배치한다. 왕릉에서는 산신도 왕의 통치하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능침 아래에 산신석을 배치했다. 이곳 온릉의 능침 좌측 계곡 상단에 있는 산신석은 일반 묘의 형식으로 됐다가 추봉된 능역임을 알 수 있는 시설이다.
문석인은 봉분의 한 단 아래 중계에 자리하며 장명등을 중심으로 배치돼 있다. 공복을 입고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했던 복두(頭)를 쓴 모습으로, 홀을 쥐고 문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상체가 크고 하체가 짧은 4등신의 형태인데 이는 숙종, 영조대의 조각 형태다. 장명등은 낮은 하대에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화사석은 4각으로 소박한 인상을 준다.
영조대에 조영된 온릉의 장명등.
온릉은 사가에서 자리 잡은 곳으로는 드물게 절색의 경관을 자랑한다. 앞의 조산인 북한산 능선이 웅장하며, 좌측에는 도봉산의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온릉의 재실은 의정부(議政府)와 벽제(碧蹄) 사이 39번 국도변에 자리하던 것을 1970년 도로 확장 때 철거, 현재의 홍살문 서남측에 세운 것이다. 원위치에 원형 복원이 아쉽다.
온릉은 능역 앞을 휘돌아 흐르는 일영유원지와 장흥유원지 등 주변에 물놀이 시설이 많아 여름에 찾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비공개 능이라 사전에 관리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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