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의 파이널 컬렉션. 미국판 원작 출연진의 모습(작은 사진).
“지금 내 앞에 젊고 아름다운 여성 5명이 서 있지만, 내 손엔 4명의 사진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적 인기를 끌었던 ‘도전! 슈퍼모델’의 한국판이 9월부터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을 통해 방영된다. 이제 우리는 케이블 TV에서 타이라 뱅크스와 똑같은 포즈로 무대에 서서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도전자들에게 쏘아대는 슈퍼모델 장윤주를 보게 될 것이다. ‘도전! 슈퍼모델’의 열혈 시청자들은 벌써부터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 같은 영상물을 이른바 ‘수입 포맷(format)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즉, 한국의 제작사가 원작을 만든 제작사로부터 프로그램 포맷을 수입하는 것.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는 온미디어가 미국 파라마운트사에서 ‘도전! 슈퍼모델(America’s Next Top Model)’의 포맷을 구입, 국내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서울산업대 IT정책대학원 은혜정 교수는 “등장인물만 한국인일 뿐, 원작과 똑같이 만드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수입 포맷 프로그램은 세계적으로 4조 원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며, 콘텐츠 시장의 블루오션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등장인물만 한국인, 원작과 똑같아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수입 포맷 프로그램은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다. 2009년 2월 온스타일을 통해 시즌1이 방영됐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원작을 본 시청자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지며 인기를 끌었다. 올해 1월 방영된 시즌2는 최종회에서 최고 시청률 1.34%를 기록했다. 케이블 TV에서 시청률 1%는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 온스타일 관계자는 “시즌1, 2의 성공에 힘입어 시즌3 제작을 준비 중”이라며 “2011년 초 방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남성 출연자를 향한 여성 출연자들의 거침없는 말로 화제가 되고 있는 tvN의 ‘익스트림 데이트쇼 러브스위치’(이하 러브스위치)도 프랑스의 ‘테이크 미 아웃(Take me out)’의 포맷을 구매,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또한 TV아사히‘칸파니’의 포맷을 구입해 만든 E!채널의 ‘신정환 PD의 예능제작국’과 TV아사히 ‘런던하츠’의 한국판 ‘순위 정하는 여자’도 케이블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케이블에서 제작한 수입 포맷 프로그램은 10여 개에 이른다.
포맷 프로그램을 수입하면 원제작사로부터 일종의 제작지침서인 ‘포맷 바이블(Format Bible)’을 받는다. 지침서에서는 프로그램의 세트 구성과 사용 장비, 출연진의 선정까지 규정하고 있다. 또 프로그램이 제작에 들어가면 원제작사에서 ‘플라잉 피디(Flying PD)’라 불리는 제작자가 직접 와서 원작의 바이블을 얼마나 준수하는지 관리, 감독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엄격한 바이블이 주어진다 해도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공간, 즉 무대 밖의 환경은 다를 수밖에 없다. 완벽한 세트를 갖추고 원작과 비슷한 호스트를 섭외한다 해도 원작이 만들어진 나라와 한국의 제작환경이 달라 이것이 프로그램에 영향을 준다. 문제는 국내에 들어오는 수입 포맷 프로그램 대다수가 리얼리티물인데, 한국이라는 제작환경이 이를 ‘리얼’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테이크 미 아웃’의 한국판인 ‘러브스위치’에선 신동엽 등 MC의 비중이 원작보다 크다.
적은 제작비도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수입 포맷 프로그램은 대부분 케이블 채널에서 제작된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케이블 제작환경에서, 포맷 구입으로 적지 않은 비용이 지불되면 제작비 상황은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포맷 구입비는 보통 제작비의 10% 정도.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와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의 제작을 맡은 온미디어 이우철 PD는 “미국은 글로벌한 시장이어서 프로그램 자체나 포맷을 파는 방법으로 수익 창출이 가능하다. 따라서 큰 제작비를 투입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원작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제작비로 프로그램을 재현해야 한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시청자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는 것도 수입 포맷 프로그램의 한계다. ‘러브스위치’는 남성 1명과 여성 30명이 벌이는 30대 1 맞선 프로그램인데, 이런 설정 자체가 시청자에게 말 그대로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 양성희(24) 씨는 “여성들이 남성에게 독설을 던지는 걸 보면 카타르시스는 있지만 리얼리티가 부족해 공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진희(30) 씨도 “맞선을 보러 나온 남자들은 젊고 잘생긴 데다 전문직 종사자고, 여성은 모두 어리고 예쁘다. 평범한 사람들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더 많다”고 했다. ‘러브스위치’의 황의철 PD는 “일반 직장인 남성도 출연할 수 있지만, 신청하는 사람이 적은 건 사실이다. 여성의 경우는 외모를 안 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시청자로부터 공감 어떻게 얻나
물론 수입 포맷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은 “원작의 느낌을 살리되 한국 제작상황과 시청자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한다. 이 PD는 “에피소드별로 우리나라의 트렌드를 반영한 미션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했다. ‘러브스위치’는 원작과 달리 이경규와 신동엽 두 스타 MC의 비중이 크다. 이는 스타 MC의 진행에 익숙한 국내 시청 트렌드를 반영한 것은 물론, 일반인 출연자가 채울 수 없는 말재주의 묘미를 더하기 위해서다.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게다가 수입 포맷 프로그램은 이제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문원 씨는 “우스갯소리로 ‘할리우드에는 19개 대본만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19개 대본을 서로 섞고, 고치고 해서 이뤄낸 게 오늘날의 할리우드”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TV 영상물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국내 제작사들이 프로그램 포맷을 사와 ‘당당히’ 베끼기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까.
은 교수는 “포맷 수입 프로그램이라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기존 프로그램을 모티프로 한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모방에서 시작했지만 확실한 개성을 갖추면 롱런할 수 있다는 것. MBC ‘무한도전’이 대표적인 예다.
‘무한도전’은 방영 초반에 일본 TBS 예능프로그램 ‘링컨’을 표절했다는 의혹으로 곤혹을 치렀다. 일부 도전 내용이나 프로그램 진행방식이 흡사했기 때문. 하지만 지금의 무한도전은 출연자들의 캐릭터가 확실히 자리 잡으면서 표절 논란을 잠재웠다. 이문원 씨는 “‘링컨’이 에피소드식 구성에 몇 가지 중점적인 코너가 이어지는 방식이라면, 무한도전은 스타 다큐 형태다. 같은 캐릭터를 각각 다른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재미를 더했다”며 “우리 정서에 맞는 한국식 예능의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