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와 독일 간 유물 반환 공방의 중심에 서 있는 네페르티티 여왕 흉상.
문화재 약탈, 즉 문화재 불법 유출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킨 사건은 2005년에 시작돼 지금까지 진행 중인 게티 미술관 큐레이터 매리언 트루(Marion True)에 대한 소송이다. 트루는 미국 출신의 고고미술 전공 미술사학자로 1986년부터 2005년까지 게티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로 근무했다. 그런 그가 미국인 딜러 로버트 헥트, 이탈리아인 딜러 자코모 메디치와 함께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내 프랑카빌라 마리티마 유적지에서 불법 발굴된 3500여 개의 유물을 미국에 반출할 것을 공모한 혐의로 2005년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기소됐다. 이에 대해 트루는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강탈당했던 국가 정체성 찾기
이탈리아 정부는 트루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면서 미국의 유수 미술관에 “그간 불법으로 약탈해간 문화재를 되돌려달라”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 덕에 우선 트루가 근무했던 게티 미술관으로부터 총 40점의 유물을 돌려받기로 했다. 2007년 8월 이탈리아 정부와 게티 미술관이 관련 협정을 체결한 것인데 반환 목록에는 트루가 불법 유출했다는 유물도 포함돼 있다. 물론 이런 결정이 나기까지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게티 미술관 측은 로펌을 고용해 이탈리아의 반환 요구에 반대했고, 이탈리아 정부 측은 전 문화부 장관 루텔리를 중심으로 게티 미술관에 문화교류 금지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다 결국 이탈리아가 유물의 반환 목록에서 ‘청동 청년상’을 임시 삭제하는 선에서 합의했다. 게티 미술관과의 협상으로 돌려받는 유물 40점은 이탈리아 정부가 고고학적 유산을 되찾기 위해 벌인 노력 중 최고의 수확으로 평가받는다. 그간 이탈리아 정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부터 유물 21점, 보스턴 미술관으로부터 13점을 돌려받기로 약속받은 바 있다.
유물을 되찾기 위한 이탈리아 정부의 고군분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세를 몰아 프린스턴대학 미술관 큐레이터 J. 마이클 파젯을 이탈리아 유물 불법 반출 혐의로 기소하고, 뉴욕의 딜러 에도알도 알마지아를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불법 도굴한 이탈리아 유물을 팔고 기증하고 대여한 혐의로 기소할 예정이다. 불법 반출 목록에 있는 유물 중 9점은 현재 프린스턴대학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이탈리아 정부가 프린스턴 대학 측에 해당 유물에 대한 반환 요청을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고대 문명이 발달했던 이집트, 그리스 정부도 자국 유물의 불법 유출을 주장하며 이를 돌려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네페르티티 여왕 흉상’과 ‘엘진 마블스’다.
네페르티티 여왕 흉상은 2009년 10월 개관한 독일 베를린의 노이에스 박물관 소장품 중 가장 주목받는 이집트 유물로, 1913년부터 독일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집트 문화재청장 자히 하와스는 ‘슈피겔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네페르티티 흉상이 어떠한 경로로 독일에 넘어갔는지에 대한 조사가 이미 시작됐으며, 불법으로 유출됐다는 점이 밝혀질 경우 독일 측에 공식적으로 반환 의사를 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엘진 마블스는 1801년에서 1812년에 걸쳐 영국의 엘진 경이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온 대리석 부조로, 1816년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뒤 수많은 관람객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진 마블스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2009년 6월 개관한 신(新)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엘진 마블스 복제품을 전시했다. 이에 대영박물관 측은 신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3~6개월 동안 엘진 마블스를 대여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리스 문화부 장관 안토니스 사마라스는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영국이 우리의 유적을 훼손하고 국외 반출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꼴”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한편 그리스 정부도 앞서 언급한 매리언 트루를 상대로 자국 내 유물을 불법 반출한 혐의를 두고 조사를 진행했는데, 게티 미술관으로부터 4개의 유물을 돌려받은 뒤 2007년 11월 고소를 취하했다.
게티 미술관 큐레이터 매리언 트루에 대한 소송은 문화재 불법 유출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켰다. 사진은 미국 LA 말리부에 있는 게티 미술관.
유물 반환 운동이 경제적 문제와 맞물리면서 소유권에 대한 충돌도 거세지고 있다. 미술비평가 마이클 키멜만은 “박물관들이 훌륭한 소장품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장소로 진화하는 것을 보면서, 유물을 빼앗긴 국가들이 이러한 유물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익을 자국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매리언 트루 소송은 그간 도굴당한 고대 유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 미국의 거대 미술관에 안착하게 됐는지를 알려줬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보통 미국 미술관들은 ‘기증’이라는 방식으로 소장품을 확대한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 소속 약 200개 미술관을 대표하는 미술관장협회(Association of Art Museum Directors)의 2007년도 조사에 따르면, 미국 국공립 미술관이 소유한 미술품의 90% 정도가 개인에게서 기증받은 것이다.
가장 고상한 ‘돈세탁’이 미술품 기증
그런데 이런 기증이 불순한 목적으로 이뤄진다는 게 문제다. 이탈리아 정부는 매리언 트루 사건도 불법으로 발굴한 유물을 개인 수집가들이 구입한 뒤 박물관에 기증하는 형태로 국외로 유출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매리언 트루 재판에 참석한 한 증인은 “미술품 기증은 개인 컬렉터들이 ‘돈세탁’을 하는 가장 고상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약탈 미술품을 구입한 뒤 박물관에 기증하면 세금 감면 같은 혜택을 받는다. 실제 미국에서는 개인 수집가가 미술품을 기증하면 미술품의 현재 시가와 동일한 금액을 세금에서 감해준다. 일반적으로 개인이 불법 반출된 유물을 구입할 경우, 구입가보다 시가는 20~30% 높게 책정된다. 따라서 개인은 미술품 기증을 통해 그만큼의 액수를 이익으로 남길 수 있다. 매리언 트루 재판의 이탈리아 측 증인으로 참여한 고고학자 다니엘라 리초도 “부유한 미국의 개인 수집가들이 여러 차례 불법으로 이탈리아 유물을 구입해 기증하는 형태로 부를 축적했다”고 주장했다.
재정이 열악한 국공립 박물관으로서는 수집가들이 최고급 미술품을 기증하는 게 반갑기만 하다. 또 출처가 의심스러운 미술품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면할 수 있고, 미술품을 들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쓰는 것도 아니기에 대중의 반대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처럼 각국에서 벌어지는 유물 반환 운동의 시발점이자, 엄청난 논란의 중심이었던 매리언 트루 사건의 최종 공판 날짜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2009년 3월 이탈리아 측 수석판사인 구스타보 바르바리날도는 “3년 내로 이 사건이 종결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국제 미술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