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으로 의심의 가장 친한 벗은 확신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이라크가 핵무기를 숨겨놓았다고 확신했던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대의명분으로 핵무기 소탕을 내세웠다. 바그다드에 융단폭격을 가하고 무고한 이라크 양민을 잡아 가두면서 핵무기를 찾아 나섰지만, 미국은 끝내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라크에 핵무기가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의심이 확신을 구축한 것이다.
‘문 스트럭’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각본가 존 패트릭 셰인리는 이라크 전쟁과 부시 정부의 기만적 전술에서 믿음과 의심에 대한 희곡을 착상했다. 이것이 바로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 ‘다우트’다.
이 영화에서 의심이 싹트는 장소는 다름 아닌 믿음과 신뢰의 공간 수녀원이다. 1964년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교구. 활기 넘치는 플린 신부가 보수적인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에 의해 엄격하게 운영되는 학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 한다. 플린 신부는 개교 이래 첫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입학을 허가하고 학생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어느 날 순진한 초보 수녀 제임스는 플린 신부가 학생 도널드 밀러의 내복을 옷장에 넣어두는 것을 보고, 신부와 학생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이후 제임스 수녀가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이를 고백하면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를 학교에서 쫓아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수녀원 내 진보와 보수 팽팽한 심리전
영화는 끝끝내 플린 신부와 학생 도널드 밀러 사이에 어떤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이 팽팽한 심리전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의심’일 뿐이다. 제임스 수녀가 “의심하는 것은 신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하자, 알로이시스 수녀는 “잘못된 행위를 하면 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대꾸한다. 즉 이 영화의 매혹이자 관건은 알로이시스 수녀뿐 아니라 관객들조차도 플린 신부의 사건에 대해 ‘의심’에 빠지게 만드는 데 있다.
영화에서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는 진보와 보수 진영의 대표주자로서 서로 대립하는 심리적 예각을 드러낸다. 신자들에 대해 농담을 하고 손톱을 기르며 볼펜을 쓰는 자유분방한 신부와 달리, 수녀는 볼펜이 아이들 글씨체를 망친다고 금지하고 침묵으로 일관한 저녁식사와 차에 설탕조차 넣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 얼음과 불의 대립과 같다. 그들 각자의 사상과 가치관, 세계관이 충돌하는 것. 그렇기에 알로이시스 수녀의 확신 이면에는 플린 신부에 대한 적대감과 경쟁심리가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다.
실제 뉴욕의 가톨릭 학교를 다니다 쫓겨난 경력이 있는 감독 존 패트릭 셰인리는 절제된 연출과 좌우대칭을 이루는 닫힌 공간으로 사람들의 표면과 이면에 숨겨진 심리적 무늬를 촘촘히 쫓아나간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에게 ‘신부는 나보다 상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며 주어진 서열에 충실히 따르는 듯 보이지만, 결국 플린 신부를 교구에서 내모는 그녀는 명백히 플린 신부의 위쪽에 서 있는 듯 보인다.
이때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지배 욕구 혹은 보수성을 낮은 각도의 촬영으로 잡아낸다. 층계에 서 있는 수녀를 카메라가 올려다보듯 촬영함으로써 그녀의 권위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한 것이다. 반면 플린 신부를 위에서 잡은 카메라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시선에 갇혀 있는 듯한 신부의 처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을 통해 이 의심과 확신의 드라마가 사실은 권력과 소유의 쟁탈전이라는 사실이 우화처럼, 정치적 풍자처럼 드러난다.
특히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에서 보여준 자유분방한 미혼모의 이미지를 떨치고 검은 관 같은 수녀복에 내면을 깊숙이 묻은 메릴 스트립(알로이시스 수녀원장 역)의 연기는 그녀가 왜 15회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대배우인지를 보여준다. 플린 신부 역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순진무구한 영혼의 제임스 수녀 역을 맡은 에이미 애덤스도 나무랄 데 없는 연기 앙상블을 이룬다.
“험담은 베개 찢어 날린 깃털을 다시 모으는 것”
그러나 이들 세 배우 못지않게, 단 몇 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도널드 밀러의 흑인 어머니 역을 맡은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열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동성애 성향이 있는 아들을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알로이시스 수녀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데이비스의 연기는 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이번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가 되지 못한다면 뭔가 부정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영화의 마지막, 자신의 뜻을 다 이룬 알로이시스 수녀는 찬 바람 부는 수녀원의 안뜰에서 제임스 수녀에게 “내 믿음에 의심이 든다”며 눈물을 쏟아낸다. 한때 수녀원 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싫다며 모든 창문을 막아버렸던 과거의 그녀와 대비된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수녀원의 정경, 그 사이에 적막하게 남겨진 검은 수녀복의 알로이시스의 대비는 한 사내를 쫓아내기 위해 거짓말을 감행하는 한 수녀의 도덕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의문을 던진다.
수도원에서 쫓겨나기 전 플린 신부는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한 여인에 대해 “여인의 험담은 베개를 찢고 그 깃털을 공중에 모두 날린 뒤 그 깃털을 모으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교했다. 감독이 하필 수많은 깃털이 공중에 날리는 환상적인 장면을 삽입했을까. 곰곰 생각해보시라. 그리고 의심하라, 당신의 의심을. 영화 속에 나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처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일 뿐이므로.
‘문 스트럭’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각본가 존 패트릭 셰인리는 이라크 전쟁과 부시 정부의 기만적 전술에서 믿음과 의심에 대한 희곡을 착상했다. 이것이 바로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 ‘다우트’다.
이 영화에서 의심이 싹트는 장소는 다름 아닌 믿음과 신뢰의 공간 수녀원이다. 1964년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교구. 활기 넘치는 플린 신부가 보수적인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에 의해 엄격하게 운영되는 학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 한다. 플린 신부는 개교 이래 첫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입학을 허가하고 학생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어느 날 순진한 초보 수녀 제임스는 플린 신부가 학생 도널드 밀러의 내복을 옷장에 넣어두는 것을 보고, 신부와 학생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이후 제임스 수녀가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이를 고백하면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를 학교에서 쫓아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수녀원 내 진보와 보수 팽팽한 심리전
영화는 끝끝내 플린 신부와 학생 도널드 밀러 사이에 어떤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이 팽팽한 심리전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가 아니라 ‘의심’일 뿐이다. 제임스 수녀가 “의심하는 것은 신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하자, 알로이시스 수녀는 “잘못된 행위를 하면 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대꾸한다. 즉 이 영화의 매혹이자 관건은 알로이시스 수녀뿐 아니라 관객들조차도 플린 신부의 사건에 대해 ‘의심’에 빠지게 만드는 데 있다.
영화에서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는 진보와 보수 진영의 대표주자로서 서로 대립하는 심리적 예각을 드러낸다. 신자들에 대해 농담을 하고 손톱을 기르며 볼펜을 쓰는 자유분방한 신부와 달리, 수녀는 볼펜이 아이들 글씨체를 망친다고 금지하고 침묵으로 일관한 저녁식사와 차에 설탕조차 넣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추구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 얼음과 불의 대립과 같다. 그들 각자의 사상과 가치관, 세계관이 충돌하는 것. 그렇기에 알로이시스 수녀의 확신 이면에는 플린 신부에 대한 적대감과 경쟁심리가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다.
실제 뉴욕의 가톨릭 학교를 다니다 쫓겨난 경력이 있는 감독 존 패트릭 셰인리는 절제된 연출과 좌우대칭을 이루는 닫힌 공간으로 사람들의 표면과 이면에 숨겨진 심리적 무늬를 촘촘히 쫓아나간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제임스 수녀에게 ‘신부는 나보다 상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며 주어진 서열에 충실히 따르는 듯 보이지만, 결국 플린 신부를 교구에서 내모는 그녀는 명백히 플린 신부의 위쪽에 서 있는 듯 보인다.
이때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의 카메라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지배 욕구 혹은 보수성을 낮은 각도의 촬영으로 잡아낸다. 층계에 서 있는 수녀를 카메라가 올려다보듯 촬영함으로써 그녀의 권위에 대한 욕망을 극대화한 것이다. 반면 플린 신부를 위에서 잡은 카메라는 알로이시스 수녀의 시선에 갇혀 있는 듯한 신부의 처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을 통해 이 의심과 확신의 드라마가 사실은 권력과 소유의 쟁탈전이라는 사실이 우화처럼, 정치적 풍자처럼 드러난다.
특히 뮤지컬 영화 ‘맘마미아’에서 보여준 자유분방한 미혼모의 이미지를 떨치고 검은 관 같은 수녀복에 내면을 깊숙이 묻은 메릴 스트립(알로이시스 수녀원장 역)의 연기는 그녀가 왜 15회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대배우인지를 보여준다. 플린 신부 역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순진무구한 영혼의 제임스 수녀 역을 맡은 에이미 애덤스도 나무랄 데 없는 연기 앙상블을 이룬다.
“험담은 베개 찢어 날린 깃털을 다시 모으는 것”
그러나 이들 세 배우 못지않게, 단 몇 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도널드 밀러의 흑인 어머니 역을 맡은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열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동성애 성향이 있는 아들을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알로이시스 수녀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데이비스의 연기는 평론가 로저 이버트가 “바이올라 데이비스가 이번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가 되지 못한다면 뭔가 부정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영화의 마지막, 자신의 뜻을 다 이룬 알로이시스 수녀는 찬 바람 부는 수녀원의 안뜰에서 제임스 수녀에게 “내 믿음에 의심이 든다”며 눈물을 쏟아낸다. 한때 수녀원 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싫다며 모든 창문을 막아버렸던 과거의 그녀와 대비된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수녀원의 정경, 그 사이에 적막하게 남겨진 검은 수녀복의 알로이시스의 대비는 한 사내를 쫓아내기 위해 거짓말을 감행하는 한 수녀의 도덕성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의문을 던진다.
수도원에서 쫓겨나기 전 플린 신부는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한 여인에 대해 “여인의 험담은 베개를 찢고 그 깃털을 공중에 모두 날린 뒤 그 깃털을 모으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교했다. 감독이 하필 수많은 깃털이 공중에 날리는 환상적인 장면을 삽입했을까. 곰곰 생각해보시라. 그리고 의심하라, 당신의 의심을. 영화 속에 나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처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일 뿐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