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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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은 억울하다”?

베네딕토 16세 反유대주의 혐의 시달려 … 종교 간 화해 특별한 역할 요구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gmail.com

    입력2009-02-19 1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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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님은 억울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전직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공들여 구축해놓은 타 종교와의 유대관계를 단절시키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베네딕토 교황이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일찍부터 정통 보수 신학의 석학으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의 노선이 분명한 만큼,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도 선명하게 갈린다. 일부에서는 그를 ‘정통 교리의 수호자’ ‘신의 충복(忠僕)’이라 부르며 신뢰한다. 교황이 되기 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바티칸의 2인자 역할을 한 것도 전직 교황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교황의 맹견(猛犬)’이라 불렀다. 그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교리를 해석해 교회와 현대사회의 괴리를 더욱 벌려놓았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 10억 신도를 아우르는 거대 단체다. 바티칸의 교황을 머리로 하여 추기경, 주교, 사제 등의 직제가 질서정연하게 조직된 단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작은 조직들이 광범위한 신학의 스펙트럼에 걸쳐 공존한다. 대략 왼쪽 끝에 남미를 중심으로 한 ‘해방신학’이 자리잡고 있다면, 그 반대인 극보수 쪽에는 ‘오푸스 데이’나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성 비오 10세 형제회’(FSSPX: Fraternitas Sacerdotalis Sancti Pii X·이하 ‘비오회’)를 놓을 수 있겠다.

    “교황님은 억울하다”?

    1962년 10월 로마 성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회식 광경. 1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거의 100년 만에 열린 이 공의회에서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사목헌장’ 등 개혁적 조치들이 취해졌다.

    反유대주의 주교 복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20세기 교회사의 최대 사건이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그중 하나는 미사를 각 나라 언어로 드릴 수 있게 허용한 것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63) 이후 400년 동안 오직 라틴어로만 미사 드릴 수 있었는데, 이것에 과감히 손을 댄 것이다. 그 밖에도 개신교, 동방정교, 유대교 등과의 화해 조치 그리고 현대사회의 발전에 교회도 발맞춰 나가려는 여러 개혁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이를 개혁이 아닌 개악으로 보았다. 그들은 라틴어 전통미사를 고수하며 별도로 사제를 양성하는 등 주류 가톨릭 세력과 갈등을 보이다, 1988년 4명의 주교를 교황청의 승인 없이 세운 것을 계기로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파문당하고 만다. 그러나 베네딕토 교황은 즉위 직후인 2005년 8월 비오회 지도자들을 카스텔간돌포 여름별장에 초대하는 등 이들과의 화해에 심혈을 기울였다.

    집 나간 자식을 다시 교회의 품 안에 품으려는 노력은 남들이 뭐라 할 바가 아니지만, 이 일은 그저 종교적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반(反)유대주의’라는 역사적, 국제정치적 함축이 숨겨져 있었다. 지난해 11월1일, 비오회 주교 리처드 윌리엄슨이 독일 레겐스부르크 인근에 소재한 신학교를 방문했다. 스웨덴 출신으로 개신교에서 비오회로 개종한 어떤 이의 서품을 위해서였다. 이 일은 스웨덴에서 이미 화젯거리가 됐기 때문에 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스웨덴 국영TV 리포터가 와 있었다. 서품식이 끝난 뒤 윌리엄슨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나치 범죄가 화제에 올랐을 때 윌리엄슨의 폭탄 발언이 터졌다. “600만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가스실 같은 것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집단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600만명이 아닌 20만~30만명에 불과하며,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면서 윌리엄슨은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답게 자신의 발언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아우슈비츠를 가보라. 소위 ‘가스실’ 건물 위로 굴뚝이 높이 서 있지 않느냐? 바닥에 깔리는 무거운 독가스를 저 굴뚝으로 배출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문이 엉성하고 헐겁다. 만일 가스실이었다면, 건물을 밀폐시킬 만큼 문이 단단히 잠겨야 했을 것이다.” 이 도발적인 인터뷰는 1월21일 스웨덴 TV 전파를 탔고, 인터넷을 통해 곧바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데 바티칸 교황청은 이런 세상의 난리법석에 아랑곳없이 1월24일 비오회 주교 4인의 복권(復權)을 발표했다. 교황청의 사려 깊지 못한 발표 하나가 전 세계 유대인의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는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다. 전직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유대인에게 큰 죄악을 범했다”고 고백하며 용서를 빈 바 있지만, 이 사건으로 실상 교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반유대주의 정서 역시 사라지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게다가 1월27일은 홀로코스트 기념일이었다. 이에 1월28일 이스라엘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항의 표시로 교황청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무기한 단절하고, 3월2~4일 예정됐던 회합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他 종교와 관계 악화 우려 목소리

    독일 내에서도 비난의 목소리는 드높았다. 교황이 한때 재직했던 뮌스터 대학에서는 가톨릭신학과 교수 일동의 이름으로 교황청의 처사를 비판하는 연판장이 돌기 시작했다. 학과장인 페르디난트 슈마허는 그 지역 기독교-유대교 연합회장을 찾아가 공개사과를 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교황청에서 종교 간의 대화를 담당하는 발터 카스퍼 추기경은 행정상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2월3일 독일 메르켈 총리가 직접 나서서 “이번 교황청 결정으로 홀로코스트를 부인해도 된다는 인상을 남긴다면,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교황청은 확실한 태도를 밝히라”며 압박을 가했다. 그제야 바티칸 교황청은 4일 “윌리엄슨 주교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철회해야 한다. 그전에는 가톨릭교회 주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보름가량 유럽의 여론을 들끓게 한 상황은 이로써 대략 마무리됐지만, 남겨진 상처는 컸다. 가톨릭과 유대교 사이의 신뢰와 화해 관계는 적어도 베네딕토 교황 재위 중에는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됐다. 사실 유럽 가톨릭교회의 반유대주의는 뿌리가 깊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은 거의 20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유대주의의 한 사례였을 뿐이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유럽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민족이라 하여 배척과 핍박의 대상이 됐다. 이들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해도 죄책감조차 없었다.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교황이 정통보수 노선을 취한 데 누가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로 인해 가톨릭의 유대교를 비롯한 타 종교와의 관계, 대외 관계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 요제프 라칭어는 교황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78세 고령에 전 세계 10억 신도의 수장으로 선출됐을 때, 그는 그저 ‘주님의 포도원 일꾼’이 되겠노라고 겸손히 포부를 밝혔다. 어느덧 그의 포도원 작업은 십자가 고행이 되고 말았다.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사람들은 그를 반유대주의 의혹의 눈으로 쳐다보고, 그의 노력은 수포가 된다. 그것은 반유대주의 긴 역사를 가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운명처럼 짊어져야 할 십자가다. 게다가 베네딕토 16세는 독일인이다. 젊은 시절 히틀러 군대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남들보다 두 배 이상 노력해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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