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9일자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호주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A state in mourn-ing)’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호주 유일의 전국 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도 ‘호주가 울고 있다(Nation weeps)’는 보기 드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의원내각제를 실시하는 나라여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공존하는 연방의회 의사당 지붕에 조기가 게양됐고, 의회 또한 ‘깊은 애도 기간(most sincere condolences days)’으로 정해 정치 논의를 잠정 중단한 상태다. 그야말로 비상시국인 것이다. 케빈 러드 호주 총리는 산불 현장에 설치된 산불방재본부(Country Fire Authority)에서 방재를 지휘하고,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가 2월9일 “빅토리아주 산불 재난은 호주의 평화 시기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날 중의 하루로 기억될 것”이라는 연설을 하면서 애도 기간이 시작됐다.
산불 나야 씨앗 터지는 토종식물
2월7일 빅토리아주는 최고 49℃에 이르는 폭염과 시속 100km가 넘는 강풍 속에 30여 곳에서 동시다발 산불까지 발생해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검은 주말’로 불린 이틀 동안 181명의 사망자가 생겼고(2월11일 현재), 3300km2 이상이 잿더미로 변했다. 빅토리아주 경찰당국은 최종 사망자 수가 3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1939년 ‘검은 금요일’ 사망자(70명)와 1983년 ‘재의 수요일’ 사망자(75명)의 4배가 넘는 사상 최악의 재난이다. 호주 220년 역사에 전쟁기간 말고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예가 없다.
이런 사실이 외신을 통해 보도되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필두로 베네딕토 교황,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위로 전문을 보내왔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등 세계의 지도자들이 전화를 걸어오거나 위로 전문을 보내오고 있다.
야당 당수 말콤 턴불 씨는 의회 연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냉혹한 패러독스를 받아들여야 한다. 호주 국민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지난 며칠 동안 경험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 가한 테러(the terror of that beauty)였다”고 말했다.
웨인 스완 재무장관도 “가족, 주택 등 모든 것을 잃은 피해자들이 친구와 이웃을 돕고 커뮤니티를 구출하기 위해 화재 현장으로 되돌아가다 피해를 당한 경우도 있다”고 의사당에 보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호주의 정신(The spirit of Australia)’”이라고 말했다.
자연은 저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호주 대륙도 마찬가지다. 거의 매년 발생하다시피 하는 산불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통과의례 성격을 지닌다. 이 때문에 호주 대륙에서 살아온 역사가 4만~20만년으로 추정되는 원주민은 해마다 수풀더미에 불을 질렀다. 일종의 화전(火田)이다. 일부 지역 산불은 방화로 추정된다.
호주 토종식물인 뱅크시아는 산불이 나야만 씨앗이 터지고 발아해 번식이 가능하다. 또 호주 참나무와 유칼립투스는 어지간한 산불에는 끄떡도 않는다. 잎사귀가 타고 껍질이 타서 까맣게 변하면 언뜻 죽은 듯 보이지만, 해가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순이 돋고 싱싱한 잎사귀를 매단다.
인간은 자연을 닮는다. ‘햇볕에 덴 나라(Sunburnt Country)’에 사는 호주 사람들 또한 호주 토종 나무들을 닮았다. 원주민이야 그렇다 쳐도 기껏 220년의 역사가 전부인 백인들도 불에 덴 영혼보다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한다.
호주는 인구의 90% 이상이 해안지역에 몰려 산다.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면 황량한 토양과 거친 날씨 때문에 견디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 특히 ‘건조한 대지(Dry Land)’에서 자라는 메마른 풀은 바짝 엎드린 채로 하늘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까칠까칠한 풀잎 사이로 푸른 혀를 가진 도마뱀(Blue Tongue Lizard)이 바람보다 빨리 달려갈 뿐이다.
많은 예술작품 자연재해 극복 담아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발길과 눈길이 머무는 토양과 시대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특성이 있다. 호주의 예술작품도 마찬가지. 그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자.
문학 |‘호주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헨리 로슨의 대표작 ‘양치기의 아내(Drover’s wife)’는 한번 양떼를 몰고 나가면 3개월 이상 떠도는 양치기 남편 대신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하는 산불(bush fire)과 맞서 싸우는 양치기 아내가 주인공.
아열대성 몬순기후가 몰고 오는 홍수는 산불과 경쟁이나 하듯 호주 오지의 농부들을 고단하게 만든다. 밴조 패터슨(호주 10달러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졌다)이 쓴 ‘홍수 지역의 클란시’도 같은 신세다. 바짝 말라버린 붉은 사막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지상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열흘 스무날 비가 내리다가 그치면, 바로 그 자리에 형형색색의 들꽃이 끝없이 피어난다.
미술 | 19세기 중반 호주 국민주의 화가 아서 스트리튼, 톰 로버츠, 프레드릭 매커빈은 당시의 유럽 화풍을 포기하고 호주 개척민들을 주로 그렸다. 특히 매커빈의 대표작 ‘윌로비 숲’은 중노동에 지친 아내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 남편이 찌그러진 깡통에 물을 끓이는 숲 속의 풍경을 담았다.
음악 | 호주의 컨트리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부시 발라드(bush ballards)는 주로 아일랜드풍의 비극적 선율에 담겼다. 배가 고파서 양 한 마리를 훔쳤다가 경찰에 들켜 강물에 빠져죽고 마는 시골 떠돌이의 노래 ‘왈칭 마틸다(Waltzing Matilda)’는 지금도 호주의 비공인 국가(國歌)다.
이런 호주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은 내륙의 열악한 자연환경을 소재로 삼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산불과 홍수 등을 불굴의 정신으로 극복하는 이야기 구조도 비슷하다.
호주가 지금은 최악의 산불 재난으로 슬픔에 잠겼지만 양떼구름 아래로 귀가하는 양치기처럼, 수마가 할퀴고 간 맨땅에 들꽃이 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던 클란시처럼, 이번에 당한 ‘검은 주말’을 슬기롭게 이겨낼 것으로 기대한다.
의원내각제를 실시하는 나라여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공존하는 연방의회 의사당 지붕에 조기가 게양됐고, 의회 또한 ‘깊은 애도 기간(most sincere condolences days)’으로 정해 정치 논의를 잠정 중단한 상태다. 그야말로 비상시국인 것이다. 케빈 러드 호주 총리는 산불 현장에 설치된 산불방재본부(Country Fire Authority)에서 방재를 지휘하고,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가 2월9일 “빅토리아주 산불 재난은 호주의 평화 시기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날 중의 하루로 기억될 것”이라는 연설을 하면서 애도 기간이 시작됐다.
산불 나야 씨앗 터지는 토종식물
2월7일 빅토리아주는 최고 49℃에 이르는 폭염과 시속 100km가 넘는 강풍 속에 30여 곳에서 동시다발 산불까지 발생해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검은 주말’로 불린 이틀 동안 181명의 사망자가 생겼고(2월11일 현재), 3300km2 이상이 잿더미로 변했다. 빅토리아주 경찰당국은 최종 사망자 수가 3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1939년 ‘검은 금요일’ 사망자(70명)와 1983년 ‘재의 수요일’ 사망자(75명)의 4배가 넘는 사상 최악의 재난이다. 호주 220년 역사에 전쟁기간 말고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예가 없다.
이런 사실이 외신을 통해 보도되자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필두로 베네딕토 교황,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등이 위로 전문을 보내왔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등 세계의 지도자들이 전화를 걸어오거나 위로 전문을 보내오고 있다.
야당 당수 말콤 턴불 씨는 의회 연설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냉혹한 패러독스를 받아들여야 한다. 호주 국민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지난 며칠 동안 경험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 가한 테러(the terror of that beauty)였다”고 말했다.
웨인 스완 재무장관도 “가족, 주택 등 모든 것을 잃은 피해자들이 친구와 이웃을 돕고 커뮤니티를 구출하기 위해 화재 현장으로 되돌아가다 피해를 당한 경우도 있다”고 의사당에 보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호주의 정신(The spirit of Australia)’”이라고 말했다.
자연은 저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호주 대륙도 마찬가지다. 거의 매년 발생하다시피 하는 산불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통과의례 성격을 지닌다. 이 때문에 호주 대륙에서 살아온 역사가 4만~20만년으로 추정되는 원주민은 해마다 수풀더미에 불을 질렀다. 일종의 화전(火田)이다. 일부 지역 산불은 방화로 추정된다.
호주 토종식물인 뱅크시아는 산불이 나야만 씨앗이 터지고 발아해 번식이 가능하다. 또 호주 참나무와 유칼립투스는 어지간한 산불에는 끄떡도 않는다. 잎사귀가 타고 껍질이 타서 까맣게 변하면 언뜻 죽은 듯 보이지만, 해가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순이 돋고 싱싱한 잎사귀를 매단다.
인간은 자연을 닮는다. ‘햇볕에 덴 나라(Sunburnt Country)’에 사는 호주 사람들 또한 호주 토종 나무들을 닮았다. 원주민이야 그렇다 쳐도 기껏 220년의 역사가 전부인 백인들도 불에 덴 영혼보다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한다.
호주는 인구의 90% 이상이 해안지역에 몰려 산다.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면 황량한 토양과 거친 날씨 때문에 견디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 특히 ‘건조한 대지(Dry Land)’에서 자라는 메마른 풀은 바짝 엎드린 채로 하늘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까칠까칠한 풀잎 사이로 푸른 혀를 가진 도마뱀(Blue Tongue Lizard)이 바람보다 빨리 달려갈 뿐이다.
많은 예술작품 자연재해 극복 담아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발길과 눈길이 머무는 토양과 시대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특성이 있다. 호주의 예술작품도 마찬가지. 그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자.
문학 |‘호주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헨리 로슨의 대표작 ‘양치기의 아내(Drover’s wife)’는 한번 양떼를 몰고 나가면 3개월 이상 떠도는 양치기 남편 대신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하는 산불(bush fire)과 맞서 싸우는 양치기 아내가 주인공.
아열대성 몬순기후가 몰고 오는 홍수는 산불과 경쟁이나 하듯 호주 오지의 농부들을 고단하게 만든다. 밴조 패터슨(호주 10달러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졌다)이 쓴 ‘홍수 지역의 클란시’도 같은 신세다. 바짝 말라버린 붉은 사막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지상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열흘 스무날 비가 내리다가 그치면, 바로 그 자리에 형형색색의 들꽃이 끝없이 피어난다.
미술 | 19세기 중반 호주 국민주의 화가 아서 스트리튼, 톰 로버츠, 프레드릭 매커빈은 당시의 유럽 화풍을 포기하고 호주 개척민들을 주로 그렸다. 특히 매커빈의 대표작 ‘윌로비 숲’은 중노동에 지친 아내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 남편이 찌그러진 깡통에 물을 끓이는 숲 속의 풍경을 담았다.
음악 | 호주의 컨트리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부시 발라드(bush ballards)는 주로 아일랜드풍의 비극적 선율에 담겼다. 배가 고파서 양 한 마리를 훔쳤다가 경찰에 들켜 강물에 빠져죽고 마는 시골 떠돌이의 노래 ‘왈칭 마틸다(Waltzing Matilda)’는 지금도 호주의 비공인 국가(國歌)다.
이런 호주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은 내륙의 열악한 자연환경을 소재로 삼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마다 반복되는 산불과 홍수 등을 불굴의 정신으로 극복하는 이야기 구조도 비슷하다.
호주가 지금은 최악의 산불 재난으로 슬픔에 잠겼지만 양떼구름 아래로 귀가하는 양치기처럼, 수마가 할퀴고 간 맨땅에 들꽃이 필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던 클란시처럼, 이번에 당한 ‘검은 주말’을 슬기롭게 이겨낼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