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식스티 세컨즈’의 한장면.
도둑질을 끊었으나 갱단에 잡힌 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는 각기 다른 50종류의 스포츠카를 훔쳐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카데미상까지 탄 니컬러스 케이지가 주연한 영화지만 개봉 당시 영화에 대해선 혹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자동차 애호가들에게는 그런 혹평 따윈 상관이 없었다. 영화는 명차들을 한데 모아놓은 모터쇼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페라리, 포르셰, 벤츠, 재규어, 캐딜락, 무스탕까지 멋진 차들을 한 영화에서 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자동차는 현대문명의 총아 … 그러나 최근 차 업계는 수난
애니메이션 영화 ‘카’에서 자동차는 살아 있는 동물, 아니 인간처럼 그려진다. 예컨대 눈을 자동차 앞유리창에 그려 넣은 건 그것이 훨씬 사람 얼굴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는 것이다. 타이어를 넣거나 빼는 동작은 사람의 팔과 다리의 움직임과 다를 게 없다. 자동차는 섬세한 감정을 갖고 있으며, 말하고 행동하고 표정도 짓는다.
이들 영화는 이를테면 자동차에 대한 예찬이라고 할 만하다. 자동차가 주인공이거나 혹은 사실상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자동차는 많은 영화에서 끔찍이도 사랑받는다. 특히 액션물이라면 자동차가 빠지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얼마 전 개봉된 007 시리즈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도 오프닝을 장식한 건 긴 터널 안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신이었다.
‘트랜스포머’에서 인류보다 월등히 뛰어난 지능과 파워를 지닌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서 낡은 자동차로 변신해 있는 것으로 설정되는 건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자동차와 현대인, 현대문명의 일체성이라고나 할까.
자동차 문명의 본산인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파산 지경에 이르는 등 세계 자동차 산업이 위기에 처했다. 미국 내에선 업계의 방만한 경영을 비판하며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성이 자동차 산업만이 아닌 자동차 문명에 대한 진정한 성찰로 이어질 수는 없을까. 국내에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크리스 파인 감독의 ‘누가 전기자동차를 죽였는가’라는 다큐멘터리는 자동차 발달사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새삼 들려준다. 흔히 전기자동차는 미래의 첨단기술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은 오히려 과거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자동차 보급 초기만 해도 전기자동차는 휘발유차보다 훨씬 많이 굴러다녔다. 에너지 효율이 높고 고장도 나지 않으며 환경친화적인 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왜 전기자동차는 멸종했는가. 또 1990년대에 다시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90년대 제너럴모터스(GM)가 내놓은 EV1 모델은 놀라운 성능에 저비용이었으나 제작사들은 몇 년 만에 조립라인을 폐쇄했다. 영화는 이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업체, 그런 로비에 넘어간 정부, 석유회사의 이해 등이 맞물린 결과라고 얘기한다. 영화는 이들 대기업과 정부를 비판하지만 소비자들도 자유로울 순 없다. 큰 차를 선호하고 자동차가 대기오염과 지구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외면한 소비자들도 공범이었다. 비대한 자동차 산업, 그리고 비대한 자동차 문명의 구조조정은 자동차 업계만의 숙제는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