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를 향해 걷는 발’, 브론즈, 2008(원작은 1990년 제작). 높이 170cm의 큰 작품으로 종교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한 관객이 ‘그림자’라는 브론즈 조각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누군들 외면할 수 있을까.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바닥에 엎어질 것 같은 한 남자의 모습이 바로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나의 형제인 것을.
억압적 사회와 인간의 긴장관계 육화한 작품들
조각을 옆에서 보면 팔은 지나치게 길고 몸통은 짧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거나 공예적 기교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보는 사람의 시점과 감정에 가장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보면 ‘표현주의적 인체의 마주침’이라고 할 이 작품은 1980년에 제작된 것이다. 80년대에 사회적 변혁을 갈망한 동인집단 ‘현실과 발언’에 참여했던 그에게 조각이란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와 인간의 긴장관계를 육화한 것이었다.
‘그림자’, 브론즈, 2008(원작은 1980년 제작). 잡아주지 않으면 넘어질 듯한 이 남자의 몸과 얼굴이 낯익다.
‘가슴이 휑해’라는 한탄처럼 정말로 네모난 기둥이 뚫고 나간 ‘가슴 뚫린 사나이’, 가슴을 때린 듯 가슴팍에 굵은 매 자국이 선명한 ‘청년’, 사슬에 감긴 문짝을 온몸에 매달고 걸어가는 인물상 ‘사슬을 끊고’ 등은 그 물리적인 시간 경과에도 문득 거기 서서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다.
전시의 압권은 ‘위를 향해 걷는 발’(원작은 1990년 제작)이라 할 것인데, 브론즈 소재지만 투박하고 거친 흙의 텍스처가 그대로 살아 있다.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한국사의 얼룩진 모습, 칼과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찢기어진’ 채 지상에 착지할 때의 발끝, 혹은 지상에서 비상하는 순간이라는 이중적 양면성을 표현한다. 물질성을 제거하려는 미술의 이상에 답하는, 전시기획자가 ‘조각은 인간을 위한 정신적 부적’이라고 말하는 정의에 대한 가장 근사한 답으로 보이는 것이다. 전시는 2009년 1월25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