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하나의 상상 같아서’ 가정용 인스턴트 시멘트, 무청(김장할 때 나온 것), 전선체 글씨.
졸박한 글씨와 그림 촘촘한 감상은 필수
가만, 시간을 멈춰 세워둔 채 마주한 주변과 일상을 좀더 면밀히 보고 듣고, 또다시 “가만, 아, 저기, 그게…”라며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하고 떠올리면, 그제야 각각의 반응은 제 몸뚱이를 얻어 바깥으로 나온다. 김 작가 본인은 이 반응을 ‘인문적 제스처’라고 정의한다. 작가이자 큐레이터이면서 평론가인 그가 보이는 제스처는 글로 쓰일 때도 있고, 그림으로 그려질 때도 있으며, 간혹 글인지 그림인지 아리송한 무엇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번 개인전을 두고 김 작가는 “분명 ‘현대적’ 서예라는 점을 가정해두고 이리저리 궁리해보는 짓 또는 놀음이겠다(한데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까 아니다)”라면서 쓰기-글자-글씨-문자 등에 대해 혼자 또 ‘가만,…’ 읊조리는가 싶더니, “결국 세상은 언어 너머에 있다”는 말로 갈무리한다.
1. ‘엄마의 육필’ 춘삼월, 고향 모친께서 부쳐온 갖가지 농수산물 택배 꾸러미 안에 든 꼬리표 중에서.<br> 2. ‘나는 내내’ 시인 우선환의 ‘토악질’에서 뽑은 구절 ‘나는 내내’를 길거리에서 주운 구리전선으로 쓴 글씨.<br> 3. ‘가만’ 당진 바닷가에서 주워온 정체 모를 플라스틱관, 구리전선으로 쓴 글씨, 낙엽.
김 작가는 2000년 발표한 작품 ‘부작란’에서, 눈밭을 비집고 철사가 삐져나온 장면을 찍은 사진 위에 시를 적고 전각을 찍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게 사진인지 동양화인지 오락가락하게 했다. 이후 내놓는 작품마다 동양화(특히 서예)와 서양화, 과거와 현재 등 서로 반대 지점에 있을 듯한 것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놀음’을 보여줬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들을 가지고 교란, 전유하는 그의 비상한 재주는 작업을 위한 전략적 도구라기보다 애초에 말했던 대로 느릿느릿하되 촘촘하게 감상하고 거기에 반응(혹은 제스처)하는 ‘선비’ 같은 천성에서 온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런가 하면 그는 작가와 큐레이터라는 임의적인 구분(누구는 상하위를 정하기도 하고, 누구는 아주 상반된 것이라고 단언하는)도 무색게 한다. 기획을 하는가 싶더니 슬쩍 자기 작업을 내놓기도 하고, 작업을 하는가 싶더니 그 안에 또 다른 작가의 작품을 갖다 놓기도 하면서 한바탕 ‘놀음’을 펼치는 그를 두고, 요즘 하기 좋은 말로 ‘멀티플레이어’라고 부르기보다 그의 말대로 ‘우연기생충(accidental parasite)’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 듯하다. 이번 전시가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지난 1년간 ‘템포러리 테크놀러지(Temporary Technology·김학량식 해석으로는 임시변통 상상력, 우거(寓居)의 기술)’라는 이슈에 따라 기획된 일련의 프로그램 가운데 마지막 전시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