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개정추진지원단이 주최한 ‘헌법개정 시안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3월26일 부산시청 국제회의실에서 열렸다. 토론회장을 가득 메운 300여 명의 참석자들이 토론자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다.
올해 1월9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치권은 개헌문제로 뜨겁게 달궈졌다. 여야는 대선을 앞둔 시점의 부적절성을 놓고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찬성한 반면 한나라당 등 야당은 반대했다. 논란은 95일간의 파행 끝에 여야가 ‘차기 정부가 임기 내 개헌을 추진한다’는 내용에 합의하고, 노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를 철회하면서 끝났다.
개헌 논란은 참여정부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마다 개헌문제가 등장했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 때도 그랬다. 임기가 2년여 남은 상황에서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그 여파로 대통령 레임덕 현상까지 우려되자 여당 일각에서 개헌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처럼 여야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개헌문제가 이용된 것은 비단 참여정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90년 노태우 정권은 당시 김영삼 총재(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신민주공화당) 등과 의원내각제 개헌을 담보로 3당 합당을 했다. 또 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새천년국민회의)는 김종필 총재(자유민주연합)에게 의원내각제 개헌을 약속하고 DJP 연합을 성사시켜 대선에서 승리했다.
물론 두 차례의 의원내각제 개헌은 모두 물거품이 됐지만, 개헌에 대한 필요성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정치권에서 제대로 논의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1987년 6월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그해 10월29일 9차 개헌이 단행됐다(왼쪽). 1997년 11월3일 김대중 김종필 두 후보가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DJP 후보단일화’에 합의하고 있다.
한국헌법학회는 지난해 11월19일 헌법개정안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5년 단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이 다음 선거에서 국민 심판을 받는 과정이 없어 무책임해질 수 있다는 문제, 권력누수가 조기 발생한다는 문제, 장기적인 국가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문제 등 크게 세 가지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한국학)는 “현행 헌법과 선거구조는 정부와 정당의 약화 및 무능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고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등의 선거주기가 일치하지 않아 정부가 능력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양건 한양대 교수(법학)는 “짧은 기간에 많은 과제를 수행하려 하기 때문에 정책이 졸속으로 추진되거나 업적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단임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문가와 교수들은 대안으로 4년 중임제와 결선투표제, 부통령제 도입 등을 제안한다.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4년 중임제 지지자가 다수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도 대체적으로 4년 중임제에 긍정적이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개헌과 관련해 “4년 중임제가 상식이지만 국민은 먹고사는 것이 우선이다. 급하게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도 4년 중임제와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100명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4년 중임제와 5년 단임제, 내각제 모두 장단점이 있다. 권력구조 개편은 국민 의사를 물어 신중히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유보적인 답변을 내놨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는 “4년 중임제가 옳은 방안인지 섣불리 동의할 수 없다. 노 대통령도 원포인트 개헌이라고 4년 중임제를 내놓으면서도 이상적인 것은 의원내각제라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제대로 논의가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마저 이처럼 자기 확신이 없다”며 “새 정부가 들어서면 국회에서 헌법조사연구위원회 같은 객관적 논의 틀과 공론의 장을 만들어 심도 있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국민 뜻을 물어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불규칙한 선거주기가 비효율 주범”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
노무현 정부 임기 중 대통령 4년 연임제, 대선과 총선 동시 실시를 골자로 한 ‘원포인트 개헌’이 무산됐다. 개헌에 따른 정당의 손익이 갈려서다. 국회의원의 임기가 줄어드는 것도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걸림돌은 사라졌다. 2012년에는 대선과 총선을 같은 해에 치를 뿐 아니라 개헌을 추진할 시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가 추진할 개헌은 1987년 헌법의 시행착오와 문제점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1987년 개헌에 의해 시작된 대통령 5년 단임제는 효용성 면에서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대선과 총선이 엇갈려 있기 때문에 생기는 폐단과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규칙한 한국의 선거주기는 정당정치를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다. 60년대 이후 한국정당의 평균수명은 3년이다. 심할 때는 한 해에 2개의 정당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이 같은 정당정치의 비연속성은 최근 더 심해지는 추세다. 매년 벌어지는 선거로 정당끼리는 물론 같은 정당 내에서도 공도동망(共倒同亡)식의 정치문화가 극성을 부린다.
따라서 개헌 방향은 무엇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권력구조와 제도를 담아야 한다.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동시선거다. 이번 정부에서 여야 주요 정당은 대통령 4년 연임제와 동시선거제에 의견접근을 본 바 있다. 그만큼 합의 가능성이 높은 현실적인 방안이다.
대통령 4년 연임제는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가 가능하다. 현직 대통령에게 유리할지 모르지만 무능하고 부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재선은 어렵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선거로 치르면 경제적 효과도 예상된다. 선거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는 것이다. 투표율도 올릴 수 있다. 얼마 전 치러진 재·보궐선거 투표율이 현격하게 올라간 것도 대선정국이 시작되면서 정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것과 무관치 않다. 대통령이나 국회가 선거와 정쟁에 휘둘리지 않고 정치와 정책에 더 매진할 수 있는 것도 동시선거의 장점으로 꼽힌다.
대선과 총선 동시선거 합의 가능성 커
반면 의원내각제와 이원집정제(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는 국민이나 정치인의 지지를 넓게 얻지 못한 상태다. 의원내각제는 제2공화국 때 5·16을 초래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한 바 있다. 정치적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는 전통과 거리가 먼 한국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동등한 권력을 나눠 행사하는 이원집정제나 분권형 대통령제가 잘 운영되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총리의 관계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개헌의 또 다른 단골메뉴로는 결선투표제가 있다. 결선투표제는 50% 이상 득표한 후보가 없을 때 상위 득표자 두 명이 결선 선거를 치르게 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과반수 득표 당선자를 보장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이 있다. 유권자의 30~40% 지지만 얻고 당선되는 데서 생기는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아직 불완전하다. 목적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결선투표를 통해 당선자의 정통성과 대표성이 높아지는 경우는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일정 투표율이 유지되는 동시에 1위 득표자가 최종 당선될 때로 제한된다.
결선투표제는 짧은 기간에 두 차례 투표해야 하는 데서 오는 유권자의 피로감과 투표비용 증가로 참여율이 오히려 감소할 수 있다. 더구나 선호하는 후보가 탈락한 유권자의 경우 2차 투표에 참여할 확률은 매우 낮을 것이다.
물론 결선투표제는 선거 과정에서 정당끼리 정책과 이념을 중심으로 연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조성된 불확실성으로 인해 감성적인 캠페인이나 우연적 요소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1996년 에콰도르에서는 결선투표를 앞둔 날 벌어진 월드컵 예선에서 자국 대표팀이 패하자 다음 날 여당이 선거에서 패한 적도 있다.
현재로선 권력구조뿐 아니라 기본권, 영토문제 등을 포함한 전면적인 개헌의 현실성이 낮지만, 국민적 합의가 수반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를 위해 차기 정부는 집권과 동시에 ‘개헌준비위원회’(가칭)를 구성해야 한다. 국회뿐 아니라 학자, 시민단체 등 전문가를 망라해 투명하고 공개적이며 중립적으로 개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