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부담-저급여’ 구조의 한계와 갈수록 급증하는 노인 인구로 인해 건강보험은 ‘수술’ 대상으로 전락했다.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차기 정부 또한 복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야 할 처지다. 게다가 대선 후보 모두 복지예산 마련 방안은 도외시한 채 복지 서비스 확대만 약속하고 있어 차기 정부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심각한 과제는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등 4대 연금의 적자 문제. 최근 4대 연금의 적자규모가 2050년이면 178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와 충격을 줬다. 정부는 내년 연금 적자를 메우기 위해 공무원연금에는 1조532억원, 군인연금에는 9492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사학연금은 2026년 소진될 전망이다. 국민연금의 경우 참여정부가 ‘대수술’에 나섰지만, 7월 ‘지금처럼 내고 덜 받는’ 수준으로 국민연금법을 개정함으로써 적립기금 고갈시기를 2060년으로 13년 늦추는 데 그쳤다.
이 때문에 4대 연금에 대한 근본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기득권에 부닥쳐 개혁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출범 초기부터 공무원연금 개혁을 다짐한 참여정부는 올 초 연금 보험료를 올리는 대신 퇴직금도 올려주는 ‘낮은’ 수준의 개혁안을 내놓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마저도 공무원 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국민이 짊어져야 할 각종 연금의 ‘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명 ‘노인 용돈연금’이라 불리는 기초노령연금이 내년부터 시행되는데, 여기서 연금이란 수사(修辭)에 그칠 뿐 가입자도 없고, 따라서 아무도 연금을 납부하지 않는 제도다. 결국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세금으로 재정을 부담해야 한다. 게다가 기초노령연금 수급 대상자가 앞으로 크게 늘어 국민 부담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2008년 502만명에서 2015년 644만명, 2028년 1118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저부담-저급여’ 건보 재정 개선도 시급
국민건강보험 재정 악화 문제도 차기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야 할 과제다. 2006년 747억원의 적자를 낸 건강보험은 올해 3584억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내년에는 적자폭이 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11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차상위계층 희귀난치성 질환자를 내년부터 건강보험 체계로 전환하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편성한 688억7500만원의 사업비가 원안대로 통과됐다. 그뿐 아니라 건강보험료의 일부가 2008년 7월부터 전면 시행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재원으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이란 전문 수발요원이나 간호사가 노인 가정을 방문해 간호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전문 요양기관에 입원시켜 병간호를 해주는 제도다. 이러한 시설 이용이 어려운 도서벽지의 노인 부양 가족에게는 현금이 지원된다.
건강보험이 적자에 시달리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저부담-저급여’ 구조 때문이다. 현재 건강보험료율은 4.77%로 독일 14.3%, 프랑스 13.5%, 일본 8.5% 등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역대 어느 정부도 국민 반발을 우려해 이러한 건강보험 구조의 개선을 시도한 적이 없다. 이에 최균 한림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비하고 국민건강 증진에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는 국민 인식을 전환시켜 저부담-저급여를 적정부담-적정급여 구조로 바꿔야 한다. 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라고 충고했다.
한편 여러 대선 후보들이 주요 공약으로 ‘보육 서비스 대폭 확대’를 내걸었듯 정부의 보육 지원책을 다양화, 내실화하는 과제가 차기 정부에 주어졌다. 정부가 보육을 복지 영역에 포함시킨 것은 1991년 영유아보육법을 제정, 시행하면서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유아교육진흥법 등 개별법에 산재돼 있었다.
영유아보육법을 통해 정부는 국공립 보육시설에 인건비를 지원했으며, 최근엔 저소득층에 보육료를 지원했다. 그러다 2004년 6월 보육 업무가 복지부에서 여성가족부로 이관되면서 보육료 지원 대상을 점차 확대했다. 현재는 도시근로자 월평균 가구소득의 100%에 해당하는 가정까지 보육료를 지원한다. 또한 지난해부터는 민간 보육시설에 대해 기본보조금(보육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표준보육료와 민간이 받는 보육료 차액만큼을 정부가 지원하는 금액)을 0~2세 대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보육료 지원은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아동에게만 한정돼 있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에 따라 시설 외(外) 아동들에 대한 보육 지원, 각각의 보육 형태에 맞는 보육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정부의 보육료 지원이 보육시설 이용 아동들에게만 한정돼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 정부의 복지 재정지출은 2004년 이후 꾸준히 증가해 올해 61조원에 이르렀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기준 사회보장비 지출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10% 선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 예산 증가율의 2배로 사회보장비 지출이 증가됐음에도 소득분배 상태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현재의 복지 수요가 과거와 달라졌음에도 복지정책이 과거의 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복지정책은 전 인구의 1.5% 정도에 해당하는 극빈층을 대상으로 했다. 그러나 고령화 및 여성의 사회 진출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복지 대상이 크게 확대됐다. 전체 국민 가운데 아프지 않는 사람이 없고, 늙지 않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과거 가족 책임으로 간주되던 육아도 이제는 복지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복지 수요의 변화에도 복지정책은 과거의 것 그대로다. 1977년 도입된 건강보험, 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예전의 틀을 유지하면서 계수(係數) 조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건강보험의 경우 틀은 유지한 채 보장성만 강화함으로써 재정 문제만 심각해지고 있다.
이제는 복지 패러다임과 복지 시스템을 바꾸는 것에 대해 논의할 때가 됐다. ‘보험료 부담을 늘리는 대신 복지 혜택을 넓힐 것인가, 보험금 부담을 줄이는 대신 복지 혜택을 줄일 것인가’라는 근본 질문을 던지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시점이다. 바로 이것이 복지 분야와 관련해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몇 가지 제언을 하자면 첫째, 전 국민에 대한 평생관리 체계의 정립이다. 여러 대선 후보들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를 아우르는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듯, 국민 개개인의 평생을 ‘도와줄’ 복지 시스템이 요구되는 시대가 됐다. 보육, 교육, 취업, 고용안정, 노후소득 보장 그리고 전 생애에 걸친 질병 관리를 효과적·총괄적으로 제공하는 관리체계 도입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치료비를 면제해주거나 보육비나 노후연금을 지급하라는 뜻이 아니다. 복지 패러다임을 바꾸고 필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누적된 건강보험 자료를 바탕으로 국민 A가 향후 앓게 될 확률이 높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도록 돕고, 각 개인별 소득자료를 바탕으로 국민 B가 노후에 대비해 미리 마련해야 할 대책들을 컨설팅해줄 수 있을 것이다. 평생교육 시스템은 비단 복지 차원뿐 아니라 국가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도 반드시 갖춰야 할 사안이다.
둘째, 공급자 중심의 획일화된 복지에서 개개인의 선택이 존중되는 복지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개인마다 취업 형태나 퇴직연령이 다른데도 현행 국민연금은 획일화된 급여체계와 수급연령을 강요하고 있다. 농어민과 영세자영업자는 근로기간 중에 높은 보험료를 내진 못하지만 정년이 없기 때문에 봉급생활자보다 더 오래 일할 수 있다. 그런데 봉급생활자에게 맞도록 설계된 현행 제도를 자영업자에게도 강요함으로써 국민연금이 혐오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초고령화 시대 노후 소득보장 청사진 다시 짜야
셋째, 사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분야를 중심으로 복지 정책이 강화돼야 한다. 일각에서는 현재 ‘과잉복지’가 아니냐고 지적한다. 그러나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매년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를 보면 상위 10개국 가운데 8개국은 스웨덴 노르웨이 등 복지가 잘 이뤄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즉, 복지비 지출이 많다고 국가가 비효율적이 되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보육을 예로 들어보자. 개개인이 자녀 1명씩을 맡는 것보다 전문가 1명이 3~4명의 아이를 맡음으로써 일자리도 창출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을 장려할 수 있다. 이는 노인 부양이나 요양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편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들에 대해서는 ‘경쟁 및 책임경영’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국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비용 낭비를 줄여야 한다. 이는 민영화가 어려운 복지기관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기능을 할 것이다.
넷째, 중복적 급여를 통합해야 한다. 산재보험의 장애유족연금과 국민연금의 장애유족연금 등 몇 가지 중첩 사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공급자 중심에서 벗어나 수요자 중심의 결합서비스를 제공해 제도 간 연계, 원스톱(One-Stop) 서비스 체계를 갖춘다면 가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7월 개정된 국민연금법은 ‘미완성의 작품’이라 하겠다. 제도 개정에도 적립기금 고갈이 13년 연장된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실시되는 기초노령연금과 국민연금의 관계도 명확히 해야 한다. 기초노령연금이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최저보증연금인지, 아니면 국민연금을 2층 연금으로 하는 1층 연금의 성격인지를 재정립해야 한다. 기초노령연금의 안정적 재원조달 방안, 국민연금 기금운용 거버넌스 재구축 또한 필요하다.
재정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있는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도 당연히 개정돼야 한다. 사회보장적·퇴직금적·공로보상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공무원연금 등을 성격별로 분해해 국민연금 가입자와의 형평성을 제고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조정 작업은 재정안정화라는 단순한 목적보다는, 초고령화 시대에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는 노후 소득보장 체계의 청사진을 새롭게 짠다는 의지로 추진돼야 한다.
복지정책은 더 이상 특정 취약계층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선별적·사후적·제한적 복지체계에서 벗어나 보편적·예방적·종합적 복지체계 구축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자유시장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노사정이 하나 되는 사회적 협력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제대로 된 사회안전망이다. 이 점을 차기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