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6일 열린 대선 후보 첫 TV 합동토론회. 이인제, 문국현, 권영길, 이회창, 이명박, 정동영 후보(왼쪽부터).
하지만 이런 영화 같은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지인들이 나를 괴롭혔다. 동료나 친구들은 인터넷에 이 후보가 어색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사진이 올라올 때마다 그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래도 ‘명박 오빠’가 스타일리시하다고 생각해? 응? 응?”
‘가을을 느끼는 이명박 후보’라는 제목으로 어느 인터넷 뉴스에 게재됐던 이 후보의 ‘체크 머플러, 보잉 선글라스’ 사진은 파일로 무려 14개나 받았다. 그뿐이 아니다. 이것저것 다 합하면 내 컴퓨터 ‘받은 파일함’에 저장된 이 후보의 사진 수는 이 후보의 컴퓨터에 저장된 자기 사진 수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사진을 받을 때마다 나는 항변했다. “정치인이 클라크 게이블처럼 옷을 입을 수는 없잖아?” 진심이다. 그럼에도 대선 후보들의 옷차림을 보면 울컥 할 때가 있다. 가령 이런 것들.
머플러 매는 법, 알려드릴까요?
당분간 머플러라는 말만 들어도 이 후보가 ‘가을을 느끼는’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다. 가을을 느낄 땐 초록색 체크무늬 머플러를 맸던 이 후보는 요즘엔 하늘색 머플러를 하고 다닌다. 하늘색은 한나라당을 상징하는 색이라고 하는데, 머플러의 모양이나 색상이 아니라 그가 머플러를 맨 모습이 너무 불편해 보이는 게 문제다. 이 후보가 머플러를 매는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① 목에 두른다. ②한 바퀴 휘감는다. ③ 목과 머플러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조른다. 끝.
머플러를 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매는 방법만 달리해도 한 가지 머플러로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는데 그걸 왜 그리 불편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은 방식으로 두르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후보는 옷 잘 입는 후보 가운데 한 명에 속한다. 그의 옷차림에서는 자신감이 넘치는데, 다른 후보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블레이저와 터틀넥의 매치를 즐긴다거나 다양한 크기의 체크 셔츠를 즐겨 입는 것이 그 예다. 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와 스포츠 재킷을 매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노타이 차림을 어색하지 않게 소화해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지나친 자신감은 화를 부른다. 누리꾼의 입방아에 오르는 컷들은 대부분 지나친 자신감에서 비롯된 의상들. 이 후보 선거공보에서 이 후보의 청바지 차림을 구경할 수 있는데, 이 사진을 찍을 때 이 후보의 코디네이션을 책임진다는 서양화 전공의 셋째 따님은 옆에 없었나 보다. 어울리지 않는데도 굳이 청바지를 입을 필요가 있었을까. 청바지를 입기로 했다면 왜 좀더 도톰한 진으로 만든, 클래식한 실루엣의 청바지를 입을 생각은 못했을까. 슈트를 입을 때 신는 레이스업 슈즈를 청바지와 매치하겠다는 것은 또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청바지가 어울리지 않는 상황(나이, 체형, 이미지 등)이라면 굳이 청바지를 입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세상엔 청바지와 정장 바지, 딱 두 종류의 바지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대선 후보들은 출신 당의 상징 컬러를 의상을 통해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려 한다. 오렌지색 니트를 입은 정동영 후보와 파란색 머플러를 두른 이명박 후보. 이인제 후보의 노란 점퍼는 당의 상징색이며, 머플러의 빨간색은 ‘선거 혁명’을 의미한다고 한다(왼쪽부터).
이 후보의 하늘색 머플러처럼 후보와 정당마다 고유의 색이 있는데,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그 색을 가장 세련되게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킨다. 상징 컬러를 ‘무대뽀’로 사용하는 여타 후보들(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각각 파란색과 노란색 점퍼를 입고, 이명박 후보는 하늘색 머플러를 맨다)과 달리 정 후보는 슈트 차림에 오렌지색 넥타이로 포인트를 주거나 오렌지색 니트 풀오버를 스포츠 재킷이나 점퍼와 매치함으로써 오렌지색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 앵커 시절부터 대범하고 세련된 옷차림으로 눈길을 끌었던 만큼 전체적인 스타일도 다른 후보들보다 월등히 세련됐다. 깔끔한 화이트 셔츠에 와인색 계열의 타이를 즐겨 매는데, 이런 차림새는 선명하고 깔끔한 느낌을 준다. 가끔 다른 후보들에 비해 가벼운 느낌을 풍길 때도 있으므로, 이 점은 정 후보가 해결해야 할 과제인 듯하다.
이인제 후보는 원색을 좋아해
이인제 후보가 노란색 점퍼를 입는 것은 노란색이 당의 상징색이기 때문이고, 거기에 빨간색 머플러를 두르는 이유는 빨간색에 ‘선거 혁명’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후보는 원래 원색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후보가 평상시 매고 다니는 넥타이(주황이나 노랑)나 집업 스웨터(분홍이나 초록)는 하나같이 선명한 색상이다. 언젠가 빨간색에 은색 별이 그려진 넥타이(순간 원더우먼이 떠올랐다)를 맨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이 원색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 후보가 화려한 컬러를 좋아하는 이유가 만일 그 때문이라면(나폴레옹은 화려한 보석을 대거 착용함으로써 단신을 극복하려 했다) 현실적으로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다름 아닌 바지 길이를 줄이는 것. 이 후보가 입고 다니는 슈트 바지는 길이가 너무 긴 데다 통까지 벙벙하다. 바지 길이만 정확하게 수선해도 키가 5cm는 더 커 보일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고집불통?
이회창 후보는 요즘 ‘대쪽’ 이미지를 벗고 유권자들에게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점퍼를 입고 유세에 나서는데, 그 점퍼가 보기에도 참 딱하다. 번들거리는 나일론 점퍼는 서민적이라기보다 초라하다는 느낌을 주고, 때론 가식적이라는 인상마저 심어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넥타이는 여전히 대쪽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다. 벽에 나란히 붙어 있는 대선 후보들의 포스터를 죽 훑다 보면 마지막 이 후보의 포스터에 이르러 한 가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넥타이다. 다른 후보들의 넥타이가 하나같이 ‘요즘’ 스타일인 것과 달리, 이 후보만 십수 년 전 아버지들이 하던 것 같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 우중충한 컬러, 고리타분한 프린트. 물론 클래식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이런 넥타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이런 넥타이를 매는 ‘어른’을 ‘고지식한 어른’으로 넘겨짚는다. 이 후보로서는 여간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점퍼 사는 김에 넥타이 몇 개 더 샀으면 좋을 뻔했다.
사소한, 그러나 중요한 것들
TV 토론회를 보다가 발견했는데 이회창 후보는 손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더라. 이 후보의 이런 제스처는 의도된 손짓과 긴장감으로 인한 손짓이 반반인 듯하지만, 보는 사람 처지에서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이명박 후보는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 혀로 입술을 핥았다. 품위 없어 보였다. 게다가 토론회가 진행되는 내내 이 후보의 슈트 재킷은 유독 어깨 부분이 우글우글 구겨져 있었다. 이는 재킷이 어깨는 너무 크고 품은 작기 때문이거나 이 후보의 자세가 좋지 않기 때문일 텐데, 더 좋은 이미지를 원한다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원인이 전자라면 좋은 재단사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고, 후자라면 어깨와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앉기만 하면 된다. 그런가 하면 권영길 후보는 혀를 ‘날름’하는 버릇이 있고, 정동영 후보의 웃음은 가끔 ‘썩소’처럼 보인다.
이런 버릇들은 사소하기 그지없지만, 사실 어떤 옷을 입었나 하는 점보다 훨씬 중요하다. 옷은 몇 초 만에 갈아입을 수 있지만 버릇이란 쉽게 고쳐지지 않으며, 옷은 그 사람의 취향을 보여주지만 버릇은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