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김대중 정부 시절 한국전력 민영화에 반발한 노조원들이 야간집회를 갖고 있다.
최근 한국공기업학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공기업에 종사하는 인원은 2002년 21만3000여 명에서 2006년 말 23만8700여 명으로 12.1%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부채는 194조9000억원에서 295조8200억원으로 무려 100조9000여 억원(51.8%)이나 증가했다.
이들 공기업의 방만 경영에 대한 지적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오죽하면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까지 할까. 전 직원에게 200만원 상당의 노트북을 지급한 한국방송광고공사, 정원이 초과하자 비공개로 신입사원을 채용한 석탄공사, 비상임이사에게 선진 경마산업 연수를 보낸 한국마사회, 노조 전임자 수가 64명에 이르는 철도공사 등 구체적인 사례를 꼽으려면 한도 끝도 없다.
천문학적인 부채를 안고 있으면서도 연봉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공기업 연봉자료를 보면 한국산업은행이 평균 8758만3000원으로 1위, 증권예탁결제원이 8036만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금융 부문 공기업들의 평균 연봉은 7000만~8000만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정부는 숱한 논란 속에서도 공기업 개혁 방향에 대한 로드맵을 강행했다. 이는 민영화, 인력 감축, 경영혁신, 구조조정 등 크게 네 가지 틀에서 진행됐다. 국정교과서, 종합기술금융, 대한송유관, 포항제철, 한국종합화학, 한국중공업 등이 이때 민영화된 공기업들이다.
인원과 부채 늘어 국민이 부담 떠안아
하지만 참여정부에 들어서면서 공기업 민영화는 물론 인력 감축과 구조조정 등이 전면 중단됐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히려 인원과 부채가 늘어난 실정이다.
김준기 서울대 교수(행정학)는 10월12일 서울 염곡동 KOTRA에서 한국공기업학회 주최로 열린 ‘공기업 개혁과 민영화 정책’ 토론회 주제 발표에서 “노무현 정부는 공기업의 하드웨어적인 개혁 성과를 인정한 채 소프트웨어적인 운영시스템 개선에만 초점을 맞추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2005년 6월10일 공기업 투명사회협약 체결 및 실천협의회 창립식에 참가한 한전, 주공, 도공, 토공 등 18개 공기업 사장들이 협약서에 서명한 뒤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
한전과 가스공사의 민영화는 김대중 정부 시절 숱한 논란과 토론 끝에 결정된 사안이다. 하지만 한전은 민영화 전단계인 자회사 분리까지 했다가 중단됐고, 가스공사는 판매부문 일부만 민영화한 선에서 멈춰 있다.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의 통합문제는 논의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방법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국공기업학회 회장 장지인 교수(중앙대 경영학)는 “격렬한 찬반양론이 있었지만 민영화와 통합 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토론이 끝났다. 그런데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개혁이 완성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그 부담을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대부분이 공기업 개혁에 동의한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무소속 이회창 후보 모두 공기업 민영화와 구조조정에 찬성하고 있는 것. 절차와 순서의 차이만 있는 정도다.
정동영 후보는 공기업 혁신을 바탕으로 구조조정과 단계적 민영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놨고, 이명박 후보는 공기업 민영화와 경영효율화를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회창 후보는 한전 민영화를 최우선 개혁과제로 꼽았다.
공기업 민영화와 구조조정은 대세다. 문제는 공기업 종사자들의 거센 반발과 이로 인해 예상되는 사회적 피로감이다. 김영세 연세대 교수는 “공기업 개혁에는 엄청난 저항이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 정부는 임기가 시작하자마자 별도의 태스크포스 팀(TFT)을 만들어 김대중 정부 시절 계획했던 공기업 개혁만이라도 강력하게 밀어붙여 완성시켜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주인 없는 공기업에 경쟁 주사 놓아야”조성봉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개발연구원은 11월26일 ‘외환위기 10년의 평가와 향후 전망 의견조사’란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는 교수, 연구원, 기업인 등 경제전문가 268명을 대상으로 기업 금융 노동 공공 부문 등 이른바 4대 부문 개혁에 대한 평가를 물은 설문조사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가장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 부문을 묻는 질문에 기업 부문을 꼽은 응답자가 59.3%로 가장 많았고, 금융 부문이 38.1%로 뒤를 이었다. 반면 노동과 공공 부문이 긍정적인 변화를 보였다고 응답한 사람은 각각 1.5%와 1.1%에 그쳤다. 공공 부문의 개혁이 그만큼 뒤처져 있다는 방증이다.
참여정부는 그동안 일하는 방식과 서비스를 개선하는 소프트웨어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구조조정이나 경쟁도입 또는 민영화가 없는 소프트웨어적 혁신의 성과가 거의 없었음을 대다수 전문가가 지적한 셈이다.
공기업을 제대로 개혁하려면 왜 공기업이 민간기업보다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는지를 상기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공 부문의 시장감시 기능이 눈에 띄게 뒤떨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공기업이 전력 가스 철도 도로 수도 지역난방 같은 독점기업들이다. 따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소비자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금융시장에서도 정부가 암묵적인 채무보증을 하는 셈이어서 은행도 공기업을 감시할 필요를 못 느낀다. 자본시장에서도 대부분의 공기업이 비상장기업이어서 주주의 감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런 공기업의 문제점을 인식할 때 공기업 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경쟁체제의 도입이라 할 수 있다.
경영자율화 보장해야 진정한 개선 가능
문제는 많은 공기업이 자연독점적인 네트워크 산업에 종사하고 있어 경쟁을 도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네트워크 건설과 운영 외에는 독점을 고집할 부문이 많지 않다. 또한 어쩔 수 없이 독점을 허용한다 해도 전국적 독점보다는 지역적 독점으로 한정하거나, 이에 대한 운영을 입찰로 위탁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일례로 전력산업의 경우 과거에는 한전이 발전 송전 배전 판매 등 전력공급의 모든 부문을 담당했지만 정보기술(IT)의 발전으로 전력 거래가 표준화되면서 발전과 판매 부문에서는 경쟁이 가능해졌다. 또 배전 부문에서는 전국을 여러 지역사업자에게 분할해 간접적인 경쟁을 유도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경쟁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민영화도 함께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 한전의 발전 부문은 6개의 독립된 발전 자회사로 분리돼 있지만, 한전이 100% 지분을 갖고 있는 공기업이어서 전력산업의 규제 여건이 제대로 개선되지 않은 데다 민간의 창의력도 접목되지 않고 있다.
공기업이 민간기업보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공기업 임직원도, 공무원도, 노조도 공기업의 주인이 아니다. 형식상으로는 국민이 주인이지만, 이는 아무도 주인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한국행정학회가 전국 137개 공기업과 공공기관 직원 275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공기업 직원들은 입사 후 7~9년이 되면 조직 목표에 대한 관심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분하고 반복적인 공기업 업무에 싫증이 난다는 뜻인데, 이는 결국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민영화하기 어려운 공기업에 대해서는 운영의 자율성을 높여야 한다. 올해 초 입법화된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서는 공공기관의 정관, 이사회, 임원, 예산회계, 경영목표, 경영실적 평가, 경영지침 등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통해 사실상 공기업을 꼼짝 못하게 붙들어매고 있다.
복잡한 수식과 평가지표를 적용한다고 경영이 과학화되고 성과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개선은 공기업을 정부의 손아귀에서 놔주는 경영자율화를 통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