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성 호전에도 날로 심화되는 기업들의 투자 위축은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숙제다.
수도권 억제는 역대 정권이 일괄적으로 시행해온 ‘유서 깊은’ 정책이다. 수도권정비계획법, 군사시설보호법 등 수도권을 규제하는 법률만 10여 개에 이른다. 수도권 공장총량제만 해도 도입 시기가 13년 전인 1994년이었다.
그러나 수도권 억제는 참여정부 들어 ‘국정 철학’이라고 할 만큼 더욱 강화됐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구성됐고 행정복합도시 건설, 공공기관 지방 이전 등이 추진됐다. 지난 봄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도 정부가 하이닉스반도체의 경기 이천 공장을 불허한 것은 참여정부의 이러한 의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사례다. 물론 정부는 “상수원지역 환경규제 문제”라고 말하지만, 올 초 “앞으로 수도권 내 공장 증설은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하이닉스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수도권 규제를 찬성하는 쪽은 “수도권 공장 입지 제한 때문에 기업들의 지방행(行)이 늘고 있는 게 현실이며, 수도권 억제 정책마저 없다면 지방 공동화(空洞化)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하는 쪽은 “수도권 억제 정책으로 득을 보는 곳은 수도권과 인접한 충청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한편 한나라당 이명박,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수도권 억제 정책 완화에 찬성,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반대 입장이다.
몸집 불어난 공정위 역할 축소도 도마에
대규모 기업집단에 속한 회사가 순자산액의 일정 비율을 초과해 국내 회사에 출자할 수 없게 한 출총제의 역사는 다소 복잡하다. 대기업들의 과다한 확장을 막는 데는 기여했으나 기업 퇴출과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1997년 폐지됐다가 99년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서 부활했다. 폐지 이후 대기업들의 계열사 내부 지분율이 증가하는 등 부작용이 생긴 것이 재시행의 이유다.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
이 때문에 출총제 유지론자들은 이미 출총제가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 제도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재계를 비롯한 폐지론자들은 “그렇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제도를 왜 없애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정동영, 이명박, 이회창 후보 모두 출총제 폐지 입장이다. 다만 정 후보는 “장기적으로 폐지, 순환출자는 금지”라고 선을 그었다.
출총제 폐지 논쟁과 맞물려 거론되는 것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역할 축소다. 1981년 설립된 공정거래위는 국민의 정부가 내세운 4대 개혁 대상-금융, 공공, 노동, 기업-가운데 기업 개혁의 과제를 떠맡으면서 ‘경제 검찰’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주목받았다. 참여정부 들어서는 10차례 이상 조직을 확대했을 만큼 몸집을 크게 불렸다. 이에 공정위가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다 보니 경쟁까지 억제하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명분 위주 규제정책 과감하게 풀어야”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 (사)바른금융재정포럼 이사장
무너진 성장동력을 일으키는 일이야말로 차기 정부가 모든 노력을 다해 추진해야 할 중요 과제임이 틀림없다. 사실 참여정부는 명분에 치우친 나머지 먹고사는 문제를 소홀히 했고, 그 결과 우리 경제에 성장 부진과 양극화를 초래했다.
특히 걱정스러운 점은 ‘내일을 위한 씨앗 뿌리기’ 의미가 담긴 연구개발(R·D) 투자가 부진했다는 점이다. 국내 대표기업들의 2005년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중(판매관리비에 포함되는 경상연구개발비 기준)이 3.2%로 세계 주요기업의 3.4%보다 낮았다. 이 가운데 통신업이 2.2%로 세계 주요기업(1.2%)보다 1%포인트 높게 나타났으나, 화학(국내 1.3%, 세계 3.6%) 및 자동차(국내 1.8%, 세계 4.1%) 업종에서는 크게 낮은 수준을 보였다. 씨를 적게 뿌리면 그 후유증은 미래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하루빨리 이런 부진을 씻고 한국 경제가 환골탈태하려면 먼저 광범위한 영역에서 규제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규제개혁이란 단순히 몇 가지 규제에 변화를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덩어리 규제들의 제거, 규제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인식과 논리의 변화를 뜻한다. 이를 위해서 차기 정부는 이웃 나라 일본의 최근 경험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고이즈미 정부 시절 살을 깎는 자기혁신을 단행한 바 있다. 덕분에 일본 경제는 15년 불황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설비투자가 2003년 2·4분기부터 증가세로 돌아서더니 갈수록 가속화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설비투자 회복은 대기업과 제조업이 견인하는 모양새다. 대기업의 설비투자 증대는 중견 기업의 설비투자, 소재부품 부문 중소기업의 생산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제조업의 설비투자 증대가 고용 증대, 소비 확대를 거쳐 비(非)제조업까지 연결돼 투자의 선순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설비투자 증대 원인 가운데 주목할 부분이 바로 정부의 과감한 규제 완화다.
일본 정부는 자금조달 환경 개선, 새로운 기업시스템 도입, 각종 규제 철폐 등 과감한 개혁을 통해 설비투자 증가를 촉진했다. 2003년 2월 자본금 1엔으로도 회사 설립이 가능한 ‘최저 자본금 규제 특례’를 실시해 기업 설립을 자유화했고, 이듬해 7월에는 며칠 내로 융자가 가능한 ‘중소기업 무담보융자 촉진제도’를 실시해 중소기업 설비투자를 크게 늘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일본식 수도권 집중억제 제도인 ‘공업 등 제한법’과 ‘공장 재배치 촉진법’을 폐지했다는 점이다.
불황 탈출한 일본의 과감한 개혁 참고해야
최근 기업들은 입지를 결정할 때 전 세계를 무대로 ‘발로 하는 투표(vote by feet)’를 행한다. 최적의 ‘투자 패키지’를 제공하는 국가를 선택해 입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국적을 둔 기업이라 해서 안심해선 안 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우리 정부도 지구촌의 수많은 정부 가운데 하나로, 다른 나라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와 기업 유치를 위해 경쟁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일본의 국토면적은 우리나라의 4배 가까이 된다. 이렇게 넓은 나라도 수도권 억제 정책이 가진 문제점을 인정하고 이를 포기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일본은 우리나라 출총제의 모델이 된 ‘대규모 회사의 주식보유총액 제한제도’를 2002년 11월 폐지했다. 기업 투자를 막는 걸림돌이 되는 제도를 과감히 폐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출총제는 도입된 지 20여 년이 된 제도로, 그간 제도의 목적이 경제력 집중 억제에서 재무구조 개선, 소유지배구조 개선으로 변해오면서 제도의 효과와 영향이 당초 목표에서 점차 벗어나 각종 부작용을 양산하고 있다. 출자가 투자로 연결되는 고리를 무시한 채 해당 기업의 출자를 분야에 상관없이 규제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사전적 규제이며, 자산규모가 일정 수준 이상인 기업집단에 속한 기업만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선별적 규제다. 또한 각종 부작용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느라 적용 제외 및 예외 인정 조항을 계속 늘려온 결과 누더기 규제가 돼버렸다.
과소 투자가 문제 되는 시점에서, 투자에 이르는 첫 단추를 막아버릴 가능성이 있는 출총제가 계속 유지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를 낳을 소지도 있다. 소유지배구조와 관련한 정책은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출총제는 즉각 폐지돼야 한다.
또한 공정거래 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도 차기 정부가 해야 할 과제다. 현행 공정거래제도는 ‘경제력 집중억제’와 ‘경쟁 촉진’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과정에서 집중 억제가 경쟁 억제로 이어지는 부작용 등이 상당 부분 나타나고 있다. 이를 위해 집중 억제와 관련된 정책들은 상법이나 증권거래법 등으로 이관하고, 공정거래법은 경쟁 촉진을 담당하는 법으로 대폭 개편해야 한다.
나아가 규제개혁은 규제를 담당하는 행정 및 재정 부문의 개혁까지도 연결돼 이뤄져야 한다. 중소기업청이 없어져야 중소기업이 살고, 교육부가 없어져야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웃지 못할 농담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외환위기가 있은 지 꼭 10년이 됐다. 이제 위기극복 과정에서 지나치게 명분 위주로 도입되고 강화된 정책들, 변화하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규제들에 대한 전면 재검토와 폐지를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책무가 차기 정부의 어깨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