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모성, 강한 프로 근성 40년 연기 인생 ‘클라이맥스’](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06/11/15/200611150500039_1.jpg)
우리 머릿속에는 ‘한국의 어머니상’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이미지가 형성돼 있다. 자식들에게 헌신적으로 무한한 사랑을 쏟아붓는 어머니라는 존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상처를 겪는 자식에게는 항상 마지막에 돌아가 위로받을 수 있는 따뜻함 그 자체다. 그러나 요즘은 비정한 어머니들에 대한 기사가 자주 뉴스에 등장하곤 한다.
조폭 아들 둔 어머니 역으로 열연
자신의 동료를 살해한 조폭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품고 그의 시골집을 찾아갔지만, 복수해야 할 원수의 어머니에게 모정을 느끼는 어느 조폭의 이야기가 ‘열혈남아’다. 신인 이정범 감독의 데뷔작인 ‘열혈남아’는 배우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내러티브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배우들의 위대한 연기가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 복수를 꿈꾸는 조폭으로 설경구가, 그리고 그가 살해해야 할 조폭 대식의 어머니로 나문희가 등장한다.
나문희가 맡은 점심이라는 역할은 두 아들을 키웠지만 큰아들은 조폭이 돼 어쩌다 집에 들르고, 둘째 아들은 원양어선을 타지만 남극 근처에서 행방불명돼 시신도 못 찾은 어머니다. 점심은 둘째 아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연히 어머니의 마음이 불편하거나 무엇을 느끼는 법인데 지금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만약 둘째가 죽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한다.
‘열혈남아’는 90년대 중반 이후 수없이 만들어진 조폭 소재의 영화다. 그동안 조폭 영화는 ‘조폭마누라’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로 대표되는 영화들에서 보듯, 일반인들이 가까이 갈 수 없는 ‘신비’한 존재이며 두려움의 대상인 조폭들을 희화화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권위의 소멸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즉, 영화는 허구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현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조폭 영화의 또 다른 조류는 누아르다. ‘게임의 법칙’ ‘친구’ ‘초록물고기’ 등의 영화들은 신분 상승을 꿈꾸거나 사랑에 목말라하는 결함 있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욕망으로 가득 찬 그들이 결국 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열혈남아’는 조폭이라는 장르에 어머니를 충돌시킴으로써 전혀 색다른 긴장감을 형성해 우리를 사로잡는다.
라디오 성우로 출발해 연기자로
‘열혈남아’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 열연한 나문희는, 올해 65세의 노배우다. 창덕여고를 졸업한 나문희는 1961년 MBC 라디오 공채 성우 1기로 출발했다. 그런데 개국한 TV 방송국에 연기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여운계 등 동료 성우들이 연기자 겸업 대열에 뛰어들었고, 나문희도 자연스럽게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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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요즘 여기저기서 연기가 늘었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요.”
나문희가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년)부터다. 산장을 경영하는 가족 중 어머니 역이었다. 가족코미디 영화 ‘하면 된다’(2000년)에서는 카메오로 출연했고, 배두나 주연의 ‘굳세어라 금순아’(2002년)에서는 교인의 할머니로 등장했다. ‘영어완전정복’(2003년)에서는 장혁이 맡은 문수의 어머니 조 여사를 맡아 연기했다. ‘여선생 여제자’(2004년)에서는 주인공 여미옥(염정아 분)의 어머니로, ‘S 다이어리’(2004년)에서는 지니(김선아 분)의 어머니로 나왔다.
그 이후 류승완 감독의 ‘주먹이 운다’에서는 못난 손자 상환(류승범 분)을 위해 경기장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몰래 경기 모습을 지켜보는 할머니로 등장했는데, 뜨거운 모성애를 잘 보여줬다. ‘너는 내 운명’에서는 아들 석중(황정민 분)을 위해 눈물짓는 어머니 역을 맡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들을 훑어만 봐도 나문희의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 속 배역들의 비중이 갈수록 커져온 점도 알 수 있다.
감독 큐 사인과 함께 자신도 모르게 극중 인물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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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문희에게 오랜 연기생활을 통해 생긴 버릇은,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극중 인물이 돼 연기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상당히 게으른 편이어서 집에서는 고쟁이만 입고 왔다갔다해요. 그래서 꼬라지가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해도 잘 어울리고 저렇게 해도 잘 어울려서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내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일상의 모습 속에서 그녀는 정형화된 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연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나문희의 얼굴은 평범한 편이다. 왕년의 미모를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얼굴도 아니다. 입 부분은 조금 돌출되어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이런 모습이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인상을 만든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삶에서 체험한 진정성을 꾸밈 없이 솔직하게 전달한다는 데 있다. 가끔 파격적 변신이 기대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갈 데 없는 우리의 어머니다. 한국 영화에서 어머니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한, 나문희는 오래토록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