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4일에 방송 전파를 탄 어물전 주인 이일순(61·자갈치 아지매) 씨의 방송 연설은 대선 국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선후보 찬조 연설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이 연설은 노 후보가 미디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디딤돌 구실을 했다.
‘자갈치 아지매’를 발굴한 사람은 조광한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 조씨는 대선 때 노 후보 캠프에서 찬조연설기획단을 이끌었다. 홍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현 정권 출범 후 대통령비서관을 거쳐 한국가스공사 감사를 지냈다.
노무현 정권의 ‘제 식구 챙기기’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있다. 조씨처럼 대통령비서실에서 경력을 쌓은 뒤 정부 산하기관 기업체 등에서 알짜배기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조씨는 대선에서 공을 세운 노 대통령의 386참모 가운데 권력 핵심부에서 일찌감치 밀려난 인사로 꼽힌다. ‘언론 개혁론자’들로 가득 찬 청와대에서 ‘유연한 대(對)언론 접근법’을 강조하다가 내부 경쟁에서 밀렸다는 말이 나왔다.
퇴직 후 산하기관 등 알짜배기 차지하기도
조씨는 노무현 정부의 대통령비서실이 꾸려진 2003년 3월 청와대에 입성했다가 같은 해 12월22일 청와대 비서실 개편에서 낙마했다. 그가 9개월 만에 청와대에서 밀려난 일은 당시로선 뜻밖이었다.
청와대는 조씨를 낙마시키면서도 꼼꼼하게 챙겼다. 그는 2004년 3월까지 ‘특정한 보직 없이’ 비서관 신분을 유지했다. 12월 개편에서 물러난 김현미(열린우리당 의원), 박범계 전 비서관 등 다른 인사들과 달리 청와대에 계속 적을 두게 해 급여를 지급한 것.
조씨는 결국 2004년 4월21일 한국가스공사에 ‘낙하산 감사’로 내려갔다. 언론 보도를 통해 조씨가 한국가스공사 감사에 내정된 사실이 알려진 때는 같은 해 3월8일. 공교롭게도 그날은 조씨가 청와대를 ‘정식으로’ 퇴직한 날이었다. 이후 조씨는 감사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조씨에 대한 청와대의 이런 배려는 어떻게 보면 ‘인간미 넘치는’ 인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금을 내는 국민 처지에서 보면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퇴직을 앞둔 공무원이 정상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서 월급을 받았다면 이는 분명 국민 세금이 낭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3년 7월31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 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가 열리기 직전 당시 윤태영 대변인, 이호철 민정1비서관, 곽해곤 현장 모니터비서관(오른쪽부터)이 구수회의를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보좌한 김경륜 대통령 제2부속실장은 2004년 5월18일 제2부속실장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청와대는 “김경륜 제2부속실장이 사의를 표명해 제2부속실장은 후임자를 구할 때까지 공석으로 남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비서관은 같은 해 9월1일까지 ‘특정한 보직 없이’ 비서관직을 유지하면서 급여를 받았다.
노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으로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브리핑’ 제작 책임자이던 박종문 전 대통령국정홍보비서관도 3개월 동안 총무팀 소속 비서관으로 소일했다. 박씨는 대선캠프에서 ‘노무현 브리핑’을 만들었고 이후 ‘인수위 브리핑’을 거쳐 ‘청와대 브리핑’까지 제작한 노무현 캠프 홍보라인의 핵심 인사.
박씨도 조씨처럼 정권 초 내부 경쟁에서 밀려났는데, 청와대에 들어간 지 2개월 만인 2003년 5월 국정홍보비서관에서 면직됐을 때는 “청와대 브리핑을 만들면서 혼선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뒷말이 나왔다. 이후 사실상의 ‘무임소 비서관’으로 3개월을 보낸 박씨는 같은 해 9월15일 요코하마 총영사로 임명됐다. 박씨가 청와대에서 퇴직한 것은 8월29일.
안연길 전 대통령보도지원비서관은 2004년 11월2일 보도지원비서관직에서 물러났다. 안씨가 사실상의 대기발령 상태로 청와대에 적을 둔 것은 2005년 2월3일까지다. 안씨는 청와대 퇴직 직후 주 이탈리아대사관 참사관(홍보관)으로 옮겨갔다. 11월2일부터 한동안 보도지원비서관은 공석이었다.
“취업할 곳 없는 비서관들에 대한 배려”
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은 두 차례나 사실상의 ‘대기발령’을 받았다. 현 정부 초대 대변인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잇따른 실수로 2개월여 만에 대변인직에서 물러난 송씨가 3개월 동안 총무팀 소속 비서관으로 재직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송씨는 2003년 8월 국내언론비서관으로 복귀했는데, 첫 번째 대기발령은 새 자리에 임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당시 송씨는 청와대로 매일 출근했다고 한다. 하지만 송씨는 같은 해 12월 인사에서 조광한 전 비서관 등과 함께 다시 물러났는데, 2004년 3월8일까지 청와대 비서관 신분을 유지하면서 급여를 계속 받았다.
곽해곤 전 제도개선비서관도 2003년 12월 인사에서 제도개선비서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듬해 3월2일까지 사실상의 무임소로 비서관직을 유지했다. 곽씨는 청와대에서 퇴직하자마자 부동산신탁업협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주간동아’가 분석한 100여 명의 퇴직 청와대 비서관 중 18%가량이 면직일 이후에도 대기발령 형태로 청와대에서 비서관으로 재직했다. 물론 이 중엔 퇴직 절차가 늦어져 퇴직이 1~3주가량 늦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포함돼 있다. 나머지 80%는 모두 면직과 동시에 퇴직했다. 왜 청와대는 사실상의 대기발령 형식으로 특정 인사들의 퇴직을 미룬 것일까? 안봉모 전 대통령국정기록비서관의 설명이다.
2003년 10월 당시 청와대 비서관들이 서울공항에서 아세안+3 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기다리며 도열해 있다.
또 다른 전직 대통령비서관은 특정 보직 없이 발령을 낸 것은 퇴직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였다”면서 “기업에서도 퇴직 전에 유예기간을 주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노 대통령의 부산지역 언론특보 출신인 안 전 비서관은 2004년 5월18일 국정기록비서관직에서 면직된 뒤 같은 해 9월1일까지 사실상의 대기발령 상태로 비서관 신분을 유지했다. 안씨는 1987년 부산일보 기자 시절 대우조선 이석규 씨 사망사건을 취재하면서 노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청와대를 나온 뒤 2006년 초 한국교통방송(TBN) 부산본부장을 지냈다.
신봉호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부)는 현 정부 출범 후 2003년 3월부터 12월까지 청와대에서 정책조정비서관 등으로 일했는데, 신 교수도 2003년 12월 정책조정비서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듬해 2월 중순까지 특정 보직이 없는 비서관으로서 청와대에 적을 뒀다. 신 교수는 청와대에서 퇴직한 뒤 곧바로 서울시립대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들 외에도 2004년 7월 대한광업진흥공사 감사로 취임한 양민호 전 대통령민원제안비서관, 권선택 의원 등 퇴직을 앞두고 사실상의 대기발령 형식으로 일정 기간 청와대에 적을 둔 전직 비서관들이 적지 않다.
청와대 측 “비서실 직제에 대한 오해”
권 의원은 신 교수와 같은 날 당시 보직에서 면직된 뒤 2월18일까지 청와대에 적을 두었다. 그는 대통령비서관 신분을 유지한 채 2004년 2월 대전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원칙대로라면 청와대에 출근했어야 할 비서관이 지방에서 정치활동을 한 셈이다.
이러한 청와대의 인사 행태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퇴 의사를 밝힌 뒤 8월25일 의전비서관직에서 면직된 천호선 씨의 실제 퇴직일은 10월17일인 것으로 알려졌다.
퇴직 전 대기발령 제도와 관련해 청와대 관계자는 “대기발령, 무임소 비서관 등의 표현은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특정 보직의 비서관’에서 그냥 ‘대통령비서실 비서관’으로 발령난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또 “대통령비서실 비서관으로 재직하면서 업무를 인계하는 등 이런저런 일을 한 것으로 안다. 또 일부 비서관의 경우엔 사표를 낸 뒤 퇴직 절차를 밟는 과정이 길어져 급여가 지급된 경우도 있다. 출근을 제대로 하지 않고 급여를 받은 사례는 퇴직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벌어진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김희정 의원은 이에 대해 “퇴직한 청와대 비서관의 80% 이상이 면직과 동시에 청와대를 나왔는데, 일부 비서관들만 퇴직을 앞두고 일종의 특혜를 받은 셈”이라면서 “청와대가 국민 세금을 허투루 쓴 혐의에 대해 국회에서 문제 제기를 한 뒤 감사원 감사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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