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담’이라는 게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저속하고 품격이 낮은 이야기나 말’이라는 뜻으로, 직역하자면 육체의 언어쯤 될까.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피와 살과 욕과 정으로 빚어내는 징글맞은 연애담, 본능과 육체의 언어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남녀에 관한 이야기다. 보고 나니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란 제목은 너무 점잖은 표현이고, ‘연애, 그 막을 수 없는 X 같음’(X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정도 되는 육담이다.
연아 역의 장진영 욕설과 애정 연기 압권
더도 덜도 말고 딱 70년대 호스티스 멜로 같은 이야기가 있다. 여자는 술집 작부이고, 남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갈빗집에 얹혀사는 할 일 없는 건달이다. 남자는 마음이 동하면 여자에게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굴지만, 실은 약혼자가 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기둥서방인지 애인인지 남편인지 구분짓지 않고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싸울 때는 악다구니를 써대며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죽인다” “찢어놓는다”를 입에 달지만, 남자는 술에 취해 죽도록 토하고 나서는 다시 여자의 사타구니와 입술로 기어든다. 정분이 쌓여도 한참 쌓여 물고 빨고 하는 사이. 빌어먹을, 그런데 이 남자가 결혼을 한단다. 둘의 사이를 눈치챈 남자의 어머니는 이참에 혼인신고까지 해놓았고, 눈이 뒤집힌 여자는 덮쳐오는 연애의 내리막을 막을 길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 영화를 보니, 작부와 건달의 사회적 벽은 정말 100% 신분의 벽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여의사와 조폭의 있을 수 없는 순애보도 아니고, 농부가 술집 여자를 위해 청산가리를 마시면서까지 지켜내는 ‘너는 내 운명’도 아닌 이야기다. 일상적이라고 보이는 가족이란 제도조차 꿈일 수밖에 없는 천하디 천한 것들의 순정담. 영화는 신분 차이라는 것이 이 사회 가장 낮은 동네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며, 그것은 심지어 상류층과 중류층의 계급차보다 더 가혹하고 엄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특히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산전수전 다 겪은 묵직한 배우가 감독을 했을 경우 빚어낼 수 있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두루 가지고 있다. 영운으로 분한 김승우와 연아로 분한 장진영은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장진영의 연기는 근자 여배우들의 연기 가운데서 으뜸일 정도로 압권인데, 술에 취한 남자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눈물 반 콧물 반 상태로 읊조리는 “넌 도대체 나한테 뭐니?”라는 대사로 이 거친 연애담의 가장 매끄러운 속살을 기꺼이 드러낸다. 김승우의 경우는 코미디 영화에서 장기를 보이던 그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만큼은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휴머니즘을 담보하는 장치가 된다.
반면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영화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마치 구전담처럼 굽이굽이 펼쳐져, 영화적으로는 지지부진하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영운이 “결혼하자”, 연아는 “첩년도 좋고 세컨드도 좋으니까 날 버리지만 말아줘”라고 애걸하는데, 그걸 그대로 믿을 관객이 있다고 믿는 감독이 너무 순진하다 싶다. 이 시대착오적인 대사가 절절하게 들리기 위해서는 연아라는 캐릭터에 좀더 공을 들여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남자들 이야기에 능해 보이는 감독은 이야기의 태반을 놀고 먹는 장면에 써버린다(게다가 클로즈업도, 줌도, 360도 트레킹도, 슬로모션도 장르적 감수성을 가지고 관객들을 흡인하기에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뒷골목의 다양한 인간군상 모습 선보여
그렇다. 이 영화의 진짜 제목은 ‘양아치들,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 할 만하다. 아니, 차라리 참을 수 없게 무거운 연애담은 쏙 빼놓고 이 이야기만 했어도 좋겠다 싶다. 배우 출신이며 ‘파이란’의 각본가인 김해곤 감독이 공들여 축조한 이 세계는 동네 어귀의 발치에 놓인 뒷골목에 관한 비애와 소란스러움으로 늘 왁자지껄하다. 영운의 친구들은 마누라를 방에서 팼는지 옥상에서 팼는지를 두고 내기를 걸고, 그걸 어린 아들에게 물어보는 철없는 인간 말종이며 동시에 피터팬인 인간들이다. 한 명은 영운처럼 작부 애인에게 푼돈이나 빌려 쓰고, 또 한 명은 마누라를 패서 가출했고, 다른 한 명은 공장 운영 자금을 빼내 친구들과 놀기에 바쁘다. 이들은 누군가에게 기생한다는 점에서 조폭도 못 되는 양아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태반은 룸살롱이나 노래방에서 노는 장면인 것도 이들의 세상이 바로 질펀하게 먹고 마시는 디오니소스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김해곤 감독의 장기는 순정보다는 이 양아치 무리에 관한 세부 묘사의 사실성과 묘한 연민, ‘파이란’에서 최민식이 분한 강재 캐릭터를 축조할 때 그러하듯, 이 세계에 대한 동질감에서 항상 에너지가 분출하는 듯하다. 문제는 이것이 어떤 카니발적인 세상으로서 관객들에게 각인되려면 현실을 벗어나는 환상성이나 다층성을 지녀야 하는데, ‘파이란’의 경우 장백지의 신비스런 얼굴과 중국 여인이라는 공간적 거리감이 그 팬터지가 들어설 여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는 그러한 팬터지나 구원의 감수성으로써 충만한 여백이 도통 부족하다. 단 한 장면, 영운의 신혼여행에서 스포츠카를 탄 두 사람의 팬터지가 펼쳐지지만, 이 역시 절절하기보다는 상투성을 면치 못한다.(이 지점에서 똑같은 정글과 안개의 도시에 살지만 김해곤은 김기덕 같은 악어과의 감독이라기보다 언제나 정글의 내부에서 그 시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군집성 동물이라는 예감을 떨치기 어렵게 한다.)
예술영화도, 장르영화도 아닌 ‘참을 수 없는 모호함’
그래서 영화는 ‘라이방’과 ‘파이란’의 어딘가에서 서성인다. ‘연애의 목적’보다 질척거리고, ‘너는 내 운명’보다 비루하다. 나는 김해곤 감독의 육화된 밑바닥 자산이 ‘순정’이나 ‘의리’ 같은 클리셰에 매달리기보다 폭발적인 어떤 상상력이 깃든 새로운 것으로 환골탈태하기를 바란다. 사람 입 속에 도시가 있어, 거기서 먹고 마시기만을 반복하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같은 그로테스크한 패러디나 과장된 입담도 좋고, ‘파이란’처럼 아예 원작이 있어서 그 순백의 원작에 생생한 온기와 힘을 불어넣는 일이어도 좋다. 그러나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아직은 감독 자신의 이야기다. 기이하게도 줄거리는 매우 통속적인데, 일반 대중에게 통하는 통속성은 부족하다. 그러니 배우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지만, 예술영화도 아니고 장르영화도 아니다. 거참, 참을 수 없는 김해곤 영화의 모호함이로다.
연아 역의 장진영 욕설과 애정 연기 압권
더도 덜도 말고 딱 70년대 호스티스 멜로 같은 이야기가 있다. 여자는 술집 작부이고, 남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갈빗집에 얹혀사는 할 일 없는 건달이다. 남자는 마음이 동하면 여자에게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굴지만, 실은 약혼자가 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기둥서방인지 애인인지 남편인지 구분짓지 않고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싸울 때는 악다구니를 써대며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죽인다” “찢어놓는다”를 입에 달지만, 남자는 술에 취해 죽도록 토하고 나서는 다시 여자의 사타구니와 입술로 기어든다. 정분이 쌓여도 한참 쌓여 물고 빨고 하는 사이. 빌어먹을, 그런데 이 남자가 결혼을 한단다. 둘의 사이를 눈치챈 남자의 어머니는 이참에 혼인신고까지 해놓았고, 눈이 뒤집힌 여자는 덮쳐오는 연애의 내리막을 막을 길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 영화를 보니, 작부와 건달의 사회적 벽은 정말 100% 신분의 벽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여의사와 조폭의 있을 수 없는 순애보도 아니고, 농부가 술집 여자를 위해 청산가리를 마시면서까지 지켜내는 ‘너는 내 운명’도 아닌 이야기다. 일상적이라고 보이는 가족이란 제도조차 꿈일 수밖에 없는 천하디 천한 것들의 순정담. 영화는 신분 차이라는 것이 이 사회 가장 낮은 동네에서도 엄연히 존재하며, 그것은 심지어 상류층과 중류층의 계급차보다 더 가혹하고 엄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특히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산전수전 다 겪은 묵직한 배우가 감독을 했을 경우 빚어낼 수 있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두루 가지고 있다. 영운으로 분한 김승우와 연아로 분한 장진영은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연기력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장진영의 연기는 근자 여배우들의 연기 가운데서 으뜸일 정도로 압권인데, 술에 취한 남자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눈물 반 콧물 반 상태로 읊조리는 “넌 도대체 나한테 뭐니?”라는 대사로 이 거친 연애담의 가장 매끄러운 속살을 기꺼이 드러낸다. 김승우의 경우는 코미디 영화에서 장기를 보이던 그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만큼은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휴머니즘을 담보하는 장치가 된다.
반면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영화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마치 구전담처럼 굽이굽이 펼쳐져, 영화적으로는 지지부진하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영운이 “결혼하자”, 연아는 “첩년도 좋고 세컨드도 좋으니까 날 버리지만 말아줘”라고 애걸하는데, 그걸 그대로 믿을 관객이 있다고 믿는 감독이 너무 순진하다 싶다. 이 시대착오적인 대사가 절절하게 들리기 위해서는 연아라는 캐릭터에 좀더 공을 들여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남자들 이야기에 능해 보이는 감독은 이야기의 태반을 놀고 먹는 장면에 써버린다(게다가 클로즈업도, 줌도, 360도 트레킹도, 슬로모션도 장르적 감수성을 가지고 관객들을 흡인하기에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뒷골목의 다양한 인간군상 모습 선보여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한 장면.
예술영화도, 장르영화도 아닌 ‘참을 수 없는 모호함’
그래서 영화는 ‘라이방’과 ‘파이란’의 어딘가에서 서성인다. ‘연애의 목적’보다 질척거리고, ‘너는 내 운명’보다 비루하다. 나는 김해곤 감독의 육화된 밑바닥 자산이 ‘순정’이나 ‘의리’ 같은 클리셰에 매달리기보다 폭발적인 어떤 상상력이 깃든 새로운 것으로 환골탈태하기를 바란다. 사람 입 속에 도시가 있어, 거기서 먹고 마시기만을 반복하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같은 그로테스크한 패러디나 과장된 입담도 좋고, ‘파이란’처럼 아예 원작이 있어서 그 순백의 원작에 생생한 온기와 힘을 불어넣는 일이어도 좋다. 그러나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아직은 감독 자신의 이야기다. 기이하게도 줄거리는 매우 통속적인데, 일반 대중에게 통하는 통속성은 부족하다. 그러니 배우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지만, 예술영화도 아니고 장르영화도 아니다. 거참, 참을 수 없는 김해곤 영화의 모호함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