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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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2030의 유혹, 예산 1100조원의 함정

  • 입력2006-09-11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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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8월30일 발표한 ‘비전 2030-함께 가는 희망 한국’ 보고서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전매특허처럼 ‘판~타스틱’하다. ‘2030년 삶의 질 세계 10위, 1인당 국내총생산 4만9000달러, 고령화·양극화 해결….’ ‘비전 2030’의 취지와 문제의식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비전이 현실화되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문제는 비전 달성을 위해 소요될 1100조원-눈 씻고 봐도 1100억원이 아니다-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다. 기저귀 찬 젖먹이부터 거동조차 불편한 호호백발까지 예외 없이 1인당 38만원을 내야 한단다.

    꿈은 원대할수록 좋다. 그러나 발은 땅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대통령 임기가 1년 반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 앞에 꺼내 보인 카드가 ‘원페어’인지,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인지는 그것을 쥔 정부조차도 모른다.

    자연과학과 달리 경제학은 실험이 불가능한 학문이다. 실패가 발생해도 책임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비전을 들이대는 건 지나치다. 파스칼은 말했다. “도박을 즐기는 모든 인간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확실한 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 그런데 2030년의 대한민국이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부는 어떤 ‘확실한 것’을 걸었나? 세금폭탄?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멜로드라마에선 가끔 나온다. 하객들이 빼곡히 들어찬 결혼식장. 그 안을 감도는 경건한 분위기. 신랑, 신부는 혼인서약을 한다. 이어 주례 선생이 성혼선언문을 낭독하려는 찰나, 필시 주인공 중 한 명은 식장 밖으로 내달으며 소리친다. “이 결혼… 무효야!”



    8월30일, 한국노총 대표단이 국제노동기구(ILO) 아시아·태평양 총회 행사장을 박차고 나간 게 꼭 그짝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노총과 ILO가 공동주최한 행사였으니 신랑, 신부 아닌 혼주가 뛰쳐나간 격 아닌가.

    ‘합리적 노동운동’을 운위해온 이용득 노총 위원장이 행사장에서 기자회견까지 열어 ‘노사관계 로드맵 무효’를 외친 까닭 중 하나는 노조 전임자에 대한 정부의 임금 지급 금지 방침 때문이다. 노총은 노조 활동의 무력화로 이어질 게 뻔하므로 이를 노사 자율에 맡기자고 했지만, 정부는 기존 방침을 고수했다.

    민감한 협상 사안에 관한 항의 표시는 필요하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극단적 의사 표출은 좀 속되게 말하면 ‘쪽팔리는’ 짓 아닌가. 그것도 지난해 개최 예정이던 아태총회를 비정규직 관련 법안 갈등 때문에 올해로 연기한 장본인이 우리나라였으니 망신살이 뻗쳐도 단단히 뻗쳤다.

    총회 주최 측의 느닷없는 ‘파업’을 지켜본 각국의 ‘하객’들은 뭐라 그랬을까. “저 집안 식구들? 원래 전투적이야!” 이렇게 비아냥대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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