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탁의 조부인 우중대의 묘. 등잔형 명당이라 후손들이 이곳에서 멀리 나가 살아야 잘 산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바로 옆에 단양 우씨 시조부터 5세조까지 모신 단이 있다.
고려 말 최고의 명문가로 한산 이씨와 단양 우씨를 꼽을 수 있다. 한산 이씨는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부자(父子)가 중국에서 연달아 급제하면서 문명(文名)을 떨친 집안이다. 단양 우씨는 우탁(禹倬)이 두각을 보였고, 우현보에 이르러 아들 5형제가 모두 급제하면서 고려 말의 막강한 문벌이 됐다.
두문동 72현을 꼽을 때, 구성 인원이 다른 두 개의 명단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정몽주를, 다른 하나는 우현보를 앞장세운다.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인(三仁)으로 꼽힌다. 이색, 정몽주, 길재로 구성된 고려 말 삼은(三隱)이 후대의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라면, 삼인은 당대의 세력 구도와 영향력을 반영한 명단이다.
선죽교에서 살해된 정몽주의 시신 거둬
우현보의 집안에서 크게 이름을 얻은 인물은 시조 우현(禹玄)의 8세손인 역동(易東) 우탁이다. 그는 도끼를 들고 임금에게 상소를 할 만큼 결기 있는 선비였고, 작가가 분명한 우리말 노래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시조 ‘탄로가’를 지은 시인이었다. 또한 역학(易學)에도 뛰어나 ‘역동(易東)’이라 불린 성리학자였으며, 훗날 퇴계 이황이 안동에 역동서원을 세워 추앙했을 정도로 후대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우탁에게 늦도록 아들이 없어 들인 양자가 우길생(禹吉生)이다. 그는 나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숭록대부(三重大匡崇祿大夫)에 올랐고 적성군에 봉해졌는데, 특히 정몽주가 일찍이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우길생의 아들이 우현보다. 우현보가 10세 때에 우탁이 세상을 떠났으니, 우현보는 할아버지를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현보는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喪禮)를 삼년상으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衣冠)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
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洪壽)·홍부(洪富)·홍강(洪康)·홍득(洪得)·홍명(洪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國事)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아파트와 송림에 둘러싸인 월곡역사박물관. 문중에서 만든 유일한 박물관이다(왼쪽 사진). 단양 우씨 시조단과 재실 희역당이 있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마을.
후손들 대구에 시민공원 겸한 박물관 만들어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의 우탁 출생지에 세워진 사적비.
고려와 함께 몰락한 우씨 집안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은 이방원이 주도한 제2차 왕자의 난 때였다. 정종 2년(1400년)에 우현보의 문하생인 이래(李來)가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현보에게 알렸고, 우현보는 이 사실을 둘째 아들 홍부에게 알려 이방원에게 대응하게 했다.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움직여 방간의 사병들을 제거했고, 정종으로부터 권력까지 승계할 수 있었다.
고려의 원수이자 집안의 원수인 조선에 우현보가 돌연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왜일까? 이는 우현보와 이방원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때 우현보가 시험관을 맡았다. 당시 급제자들은 자신을 입신시켜 준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칭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보다도 더 강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같은 인연이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홍부와 셋째 아들 홍강은 원종공신이 돼 우씨 집안은 정치적인 재기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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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달서구에 가면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아파트 동네에 송림 언덕과 대나무로 울타리를 친 시민공원을 겸한 박물관이다. 우현보의 후손들이 마련한 것으로 한 문중이 세운 우리나라 유일의 박물관이다. 홍명의 후손인 우배선(禹拜善)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고, 그 후손이 박물관 동네에 모여 살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생긴 보상금으로 마련한 것이다. 요사이 도시 외곽에 신도시 개발 바람이 불면서 부자 문중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 자산을 사회로 환원할 줄 아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은 우현보와 그의 후손 우배선의 정신이 그의 집안에 면면히 내려오기 때문이다.
우현보는 고려가 무너진 뒤 은거하면서 당호를 독락당(獨樂堂)으로 고쳤다. 그는 “지난 것은 모두 꿈이고 진실이 아니니, 앞으로 오는 것도 어떻게 진실임을 보증하겠는가”라고 했다. 파란만장한 삶 끝에 이른 우현보의 심정이 담긴 말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망국(亡國)의 대부다. 나를 선영에 묻지도 말고, 또한 자손들도 이곳에 묻지 말라”고 했다. 그의 무덤은 휴전선 너머 장단 고현(古縣)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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