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다리를 건너 경기 파주시 임진강역으로 돌아오고 있는 경의선 열차.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방북 시기를 연기한 데 이어 그 배경을 이처럼 직접 해명했음에도 여야 간 공방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전여옥 전 대변인의 ‘치매노인’ 발언 파문에 이어 이회창 전 대표까지 가세해 김 전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오히려 공방이 확대된 형국이다.
이런 와중에 여당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연기 배경이 청와대와 현 정부의 이중적 태도와 무관치 않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등 내부 갈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연 김 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해명한 것 이외에 방북 시기를 연기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동교동 쪽과 가까운 열린우리당 한 당직자의 분석이다.
“DJ와 노무현 대통령은 서로 생각이 다르다. DJ는 남북관계를 넘어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뭔가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는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될 인물로 남고 싶어한다. 방북을 결심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DJ의 방북을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그 덕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DJ의 방북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처지는 아니다. 한미 외교정책에서 F학점을 받은 현 정부가 대북정책마저 DJ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게 좋을 리 있겠는가.”
정부 “DJ 방북은 개인 자격”으로 한정 지어
이 당직자는 “DJ와 노 대통령 간의 이처럼 미묘한 입장 차이가 결국 DJ가 4월에서 6월로 방북 시기를 미룰 수밖에 없는 여러 정황을 제공했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김 전 대통령의 방북에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도 ‘개인 자격’이라고 선을 그은 것 △김 전 대통령이 열차방북 의지를 거듭 표명했음에도 경의선 철로 연결 대북협상에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 △임동원 전 국정원장의 동행을 희망하는 메시지에 대한 청와대의 외면 등 청와대와 정부가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섭섭할 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실제로 청와대나 정부 관계자들의 관련 발언을 살펴보면, 현 정부가 김 전 대통령 방북과의 연관성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2월22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참석한 이해찬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자격을 묻는 질문에 “순수한 개인 자격의 방북”이라며 “이 의제에 대해 정부가 구체적으로 논의할 계획이 없으며, 노 대통령의 친서 전달 등도 검토한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도 같은 날 “김 전 대통령이 평소 방북하게 되면 전직 대통령이자 민간인 신분으로 자유롭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화하고 싶다고 밝혔다”고 강조하면서 “(북한과) 허심탄회하게 동북아 문제, 북핵 문제 등 현안에 대해 물꼬를 틀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만수 대통령 대변인은 “정부는 처음부터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시기 등과 관련해 어떤 주문이나 판단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통일부 내부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방북 가능성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통일부 한 관계자가 사석에서 전한 통일부 내부 분위기다.
“북한이 DJ 태우려고 경의선을 그냥 연결해주겠는가. 북한은 실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북한은 쌀이든 비료든 실질적인 대가를 바라고 있다. 그게 약속돼야 경의선 연결의 전제인 군사적 보장조치에 합의해줄 것이다. 개인적인 자격으로 방북한 DJ가 북한에 줄 수 있는 것은 명분밖에 없다.”
김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정부의 물질적 지원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사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통일부 내부의 이런 흐름은 청와대의 인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청와대 한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의 남북관계 인식은 다분히 실용적이다. 무리하게 이끌 생각은 없다. 잘 풀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임기 내에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굳이 김 전 대통령을 통해 뭔가 해보려고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열린우리당 내에는 노 대통령과 청와대의 이런 태도와 인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 열린우리당 의원 측은 “청와대와 노 대통령의 태도에 문제가 있고, 당 내부에서 이를 비판하는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어느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상황일 뿐”이라고 말했다.
동교동 측은 그러나 이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최경환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은 북한 문제야말로 초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북을 연기한 것은 국민의 여론을 따른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거듭 강조했다.
北, 경제적 지원 받아내기 위한 버티기 說
최 비서관은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화해와 협력 기조를 정상적으로 유지해온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한다”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북핵 문제와 6자회담 등 남북한의 현안을 자유스럽고 폭넓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순수한 개인 자격으로 방북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비서관은 다만 “김 전 대통령은 임 전 원장이 결백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고 조만간 무죄로 결론이 날 것으로 믿고 계신다”며 김 전 대통령이 임 전 원장의 방북 동행을 희망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피력했다. 지난해 국민의 정부 시절 불법 감청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임 전 원장은 협심증과 당뇨병 등의 치료를 받기 위해 재판부로부터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물밑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준비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2월21일 “북한 사정 때문에 방북 연기가 결정된 것이 아니다”라는 최 비서관의 해명에도 북한 내부의 문제가 김 전 대통령의 방북 연기에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는 분석이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희망한 열차 방북은 개성-평양 간 철로의 노후화, 북한 군부의 반발 등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이미 공지의 사실이다.
한 대북 경협사업가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 답방문제에 대한 입장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 전 대통령의 방문이 부담스러운 데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남한으로부터 좀더 많은 경제적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버티는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4월 방북’이라는 카드를 일단 접었다. 여론은 물론 현 정부와 여야 정치권뿐만 아니라 북한의 반응까지 충분히 살핀 뒤 그가 내린 결론일 가능성이 높다. 애드벌룬을 띄운 뒤 여론을 보며 진퇴를 결정하던 과거 김 전 대통령의 ‘고도의 수읽기’가 다시금 재현된 듯한 느낌이 드는 까닭은 뭘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