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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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국민재판론’인가

  • 김일수 고려대 교수·법학

    입력2006-03-06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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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지금 ‘국민재판론’인가
    이달 들어 이용훈 대법원장은 공·사석에서 되풀이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재판’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재판’을 강조했다. 두산그룹 비자금사건 제1심 판결에서 재벌가 가족에게 전원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진 것을 두고 그는 “국민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며칠 전 신임 법관 임명식장에서는 “재판은 국민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이 대법원장은 “재판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지 판사의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니다. 법관에게 재판권을 수여한 주체가 국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법 질서 아래서 사법의 본래 의미에 비춰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만시지탄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나아가 이 평범한 말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 유산을 씻어내고, 헌법 질서 속에서 사법부의 제자리를 확인시켜 주는 표석(標石)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먼저 제5공화국 사법부 수장들의 철학을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1981년 4월21일 당시 이영섭 대법원장은 유태흥 신임 대법원장에게 자리를 넘기고 퇴임하면서 “나의 대법원장 재직 기간은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다”고 술회했다. 유신 아래서 악법의 적용, 10·26사태(1979) 이후 각본에 의한 졸속 군사재판 앞에서 사법부의 무기력을 그렇게 암시했는지 모른다.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신생 5공 사법부 수장을 맡는 취임 자리에서 “우리는 국방 의식, 국가안보 의식을 고취해야 합니다. 국방이 행정부나 입법부의 소관이니 우리 사법부는 오불관언해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가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른바 만세불역이라고 하는 자연법의 세계라면 모르되, 우리 실생활에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실정법의 세계에서는 법도 국가 이전의 것이 아니고 국가가 있은 연후의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법실증주의의 추종과 국가 안보를 법이념보다 우선시하는 철학의 일단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유태흥 씨의 뒤를 이어 제9대 대법원장에 임용된 김용철 전 대법원장은 1986년 4월23일 취임사에서 “법과 질서의 유지만이 국가를 지키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우리 국민이 지난날 정치와 사회의 혼란을 겪으면서 체험한 귀중한 교훈입니다. 따라서 법의 지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법치주의 원칙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는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대처해나가야 할 것입니다”라고 피력했다. 역시 법실증주의와 국가안보 우위의 철학을 담은 소신의 일단이었다.



    어두운 과거 청산, 사법 민주화 계기 되길

    그 후 김덕주, 윤관, 최종영 대법원장 시대를 거쳤지만 사법부의 새로운 철학, 새로운 출발, 법의 갱신운동을 우리는 가슴속으로 느껴보지 못했다. 표피적인 변신은 보았어도 새로운 변화를 읽을 수는 없었다. 법이 현상유지와 안정만 가져다주면 족한 줄 알았던 종래의 관념에서 벗어나 국민의 사법으로, 국민의 납득과 신뢰의 눈높이로 낮아진 사법 서비스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률은 인간 존엄성과 사회적 이익의 정당한 조정에 충분하고 공평한 보장수단이 될 때 정의의 기준에 알맞은 내용을 획득하는 것이지, 법관의 자의적인 행사 도구가 아니다.

    이제 시대는 변했고, 정치적 권위주의는 사법부를 표면적으로 간섭할 수 없는 지평에 이르렀다. 사법의 문이 열렸고, 그 문턱도 낮아졌다. 법관의 독립은 그만큼 신장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국민의 사법, 국민을 위한 사법, 국민에 의한 사법의 지평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권위주의적 의식의 쓴 뿌리가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사적 인식의 지평에서 볼 때, 이용훈 대법원장의 ‘국민재판론’이 사법부의 어두운 잔재를 씻어버리고 사법의 민주화를 새롭게 여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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