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미술관 리움의 ‘아트스펙트럼 2006’전. ① 빌딩(정정주) ② 비디오(김성환과 레이디 프롬 더 씨) ③ 동그란 꽃들(전경) ④ 신기루(송상희)
한 여성이 반투명 밀폐용기를 엉덩이 밑에 대고 변을 본다.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생크림을 얹은 뒤 딸기 장식을 한다. 변은 신선한 케이크가 된다.’
비위 약한 관람객이라면 눈살을 찌푸릴 이 비디오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곳은 실험적인 작가를 발굴하는 홍대 앞 대안공간이 아니다. 한국 고급문화의 ‘아이콘’이 된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스펙트럼 2006’(2월16일~5월14일)에 가면 이 작품을 볼 수 있다(‘도배, 표백, 반복, 완벽한 삶’, 김성환과 레이디 프롬 더 씨). 여기에 참여한 나머지 작가 15명의 작품들 역시 ‘질서의 교란과 변형, 해체, 차이와 모순’에서 이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이준 리움 현대미술 부관장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의 특징은 ‘이것은 무엇’이라고 규정하려 하면 도망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트스펙트럼 2006’이 열린 다음 날 서울 홍대 앞 ‘대안공간 루프’에서 ‘비트맵-국제디지털포토 프로젝트’전(3월14일까지)이 시작됐다. 한국을 포함한 세계 12개국에서 16명의 큐레이터와 27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회화와 팝아트, 다큐멘터리와 개념 미술 등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반영한 디지털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권위’ 획득하는 공간의 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두 전시는 우리 미술계의 극과 극 지점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아트스펙트럼 2006’은 삼성미술관 리움이 세 번째 기획한 전시다. 개관전은 ‘이중섭 드로잉전’, 두 번째는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미국 작가 매튜 모딘전이었다. ‘아트스펙트럼 2006’은 사실상 삼성미술관 리움이 기획한 첫 번째 한국 작가전인 셈.
‘아트스펙트럼’은 국내외 대가들을 중심으로 대형 기획전을 주로 열던 삼성미술관이 2001년부터 ‘한국 미술의 현재를 진단하기 위해’ 격년으로 여는 전시. 1회 때 김범, 홍수자, 이동기 등 9명의 작품이 선보였고 2회 때는 문경원, 미나 & 사사, 박세진 등 8명이 초청받았다. 1, 2회에 비하면 3회 초청작가 중에는 미국·독일 등 해외에서 작업하는 젊은 작가들이 많아 웬만한 미술 관계자들에게도 낯설다.
대안공간 루프의 ‘비트맵’전. ① 우탄패밀리(하야시 히로미) ② 1977(진시앙) ③ 무제(박형근) ④ 기대(다니엘 리)
‘아트스펙트럼’을 기획하는 삼성미술관 큐레이터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실험적이고, 확실하게 새로워서 미술관 공간을 압도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작가들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우리나라 미술계의 한쪽 끝이라면 대안공간 루프는 다른 쪽 끝이다. 그러나 ‘위’ ‘아래’ 개념은 아니다. 서로 다른 차원이지만, 동시에 경쟁관계여서 ‘뫼비우스의 띠’의 양 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안공간 루프는 1999년 미술 생산, 유통, 소비의 폐쇄적 상부구조를 미술계의 하부구조와 연결하기 위해 만든 첫 번째 대안공간이다. 이후 20개 가까운 대안공간이 생겨났고, 여전히 증가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대안공간 네트워크 그룹도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작가들이 대부분 대안공간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0 넘은 작가들은 설 곳 없어
그러나 대안공간은 말 그대로 젊고 실험적인 작가들의 ‘공간’ 확보를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미술관에서 이들을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결국 대안공간 루프는 ‘공간적 대안’을 포기하고,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적인 작가들의 대안을 찾아나서기로”(서진석 대표) 한다. 루프는 독자 건물을 마련하고 천안의 재벌기업이자 미술관인 아라리오와 일종의 ‘전략적’ 제휴관계를 맺었다. 건축가 김백선 씨의 작품인 대안공간 루프에는 80평의 전시장과 넓은 세미나룸, 카페가 있다.
“작가 발굴보다 대안적인 전시 형식을 보여주는 데 힘을 쏟을 겁니다. 한국적인 미술의 대안을 가진 작가들을 세계에 소개하는 것도 대안공간 루프의 일입니다. 일종의 벤처 공간이 되지 않을까요?”
서 대표는 은행 대출을 받는 등 운영이 힘에 부쳐 지하실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다고 했다. ‘비트맵’전은 집을 옮긴 루프의 첫 번째 기획전으로 전 세계 작가들로부터 ‘디지털 데이터’로 작품을 받아 세계 15개 공간에서 동시에 전시를 여는 방식이다. 작가보다 ‘쇼’라는 측면에 방점이 찍혀 있다.
2006년 개관한 대안공간 루프. 건물 규모로는 미술관급.
대안공간들이 난립할 조짐까지 보이는 가운데 또 다른 ‘내용적 대안’을 찾는 곳이 늘고 있는 현상은 다행스럽다. 안양 석수시장 안 상가에 자리한 ‘스톤앤워터’는 ‘보충대리공간’으로 새로운 담론을 이끌고 있으며, 길이나 공원 같은 공간을 ‘대안공간’으로 규정하는 기획자들도 등장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스펙트럼’전에 참여한 한 작가는 “외국에서라면 미술관의 역할을 대안공간들이 하고, 국공립 미술관이 해야 할 일을 기업미술관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간의 성격이 불분명하고 똑같은 관객들을 염두에 두다 보니 ‘젊고 발랄하고 힘 있는 작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져왔다. 이런 경향에 밀려 나이 50을 넘어선 작가들은 갈 곳이 없다.
‘아트스펙트럼’과 ‘비트맵’전은 2000년 이후 한국 미술계를 대표해온 대규모 기업미술관과 대안공간의 고민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다. 한국의 현대미술계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전시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