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환 특검은 “사건의 실제적 진실만은 철저히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논란을 야기한 핵심 내용은 1999년 2월부터 2002년 3월까지 대북송금을 주도한 현대상선의 주 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의 사외이사를 지냈다는 점. 이 기간중 북한으로 송금(2000년 6월)이 이뤄졌기 때문에 그도 대북송금 의혹 사건에 연루돼 있어 적격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혹 내용만 보면 송변호사는 ‘마치 돈이나 챙기는 부조리한 변호사’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90년 서울형사지법 판사를 끝으로 개업한 그는 곧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에 가입, 인권옹호 활동에 앞장섰다. 97년엔 김영삼 정부가 ‘노동법’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변호사 554명과 함께 노동법 재개정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법원의 피의자 영장실질심사제가 논란이 됐을 때 그는 “시행상의 문제점이 있더라도 심사제도 도입 자체를 철회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99년엔 대한변협의 인권이사로 활동했으며, 2000년 5월부터 2년간 민변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개혁성향 뚜렷 … 외환은행 사외이사 논란 겪기도
그의 지인들은 그를 “온화한 성품이지만 개혁성향이 뚜렷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그의 이 같은 성향은 고교시절부터 그대로 드러난다. 64년 우수한 성적으로 경기고에 들어간 그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고교생들의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경기고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당시 고3이었던 고 조영래 변호사가 주도했다.
67년 그는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충북 영동에서 자그마한 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그가 빨리 사법고시에 합격해 평탄한 길을 걷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성향대로(?) 운동권에 뛰어들었다. ‘6·8 부정선거 규탄시위(67년)’와 ‘3선개헌 반대시위(69년)’등 굵직굵직한 집회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3학년 땐 서울대 법학과의 9개 동아리 연합체 리더인 사회법학회 회장에 선출돼 학생들의 시위와 집회를 이끌었다.
공부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렸다. 당시 대학에서 사법고시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학생운동을 하는 ‘비(非)고시파’들에겐 변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딱히 갈 곳이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공군 간부후보로 들어가 4년 5개월간 근무했지만 복무를 마치고 나니 또다시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9년 만인 80년에 사법고시 22회로 합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요즘 그의 어깨는 무겁다. 네 번째 특검 사건이지만 다른 사건과 달리 무조건 ‘후벼 파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게 이번 수사다. 그렇다고 대충 수사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도록 말끔하게 해결해야죠.”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을 조화시키는 게 쉬울 것 같지는 않다. “사건의 실체와 진상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는 입장과 세부적인 내용까지 밝혀지고 공개되면 모처럼 맞은 남북화해 분위기를 해치고 장기적으로는 통일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입장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두 가지 여론을 조화시키기 위해 수사는 철저히 하되 공개는 신중하게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특검까지 거치고도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다는 말이 나오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고심중이다. 수사 경험이 없는 만큼 수사 경험이 풍부한 특검보를 찾는 게 그의 첫째 임무다. 그의 특검호는 4월18일 항해를 시작한다.
그의 취미는 바둑. 짬이 나면 가끔 같은 법무법인 소속 백승헌 변호사와 바둑을 두곤 한다. 자칭 ‘약한 1급’. 네오스톤 등 네티즌 바둑에서는 아마 3, 4단 정도다.
그는 일요일이면 가끔 청계산에 오른다. 한번 오르기 시작하면 내려올 때까지 쉬지 않는 게 그의 등산 버릇이다. 골프는 90대 중반. 정복영 여사와의 사이에 2녀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