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8월 9일(현지 시간) ‘반도체 칩과 과학 법’에 서명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백악관]
미, 반도체 산업에 2800억 달러 투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중국 우한에 위치한 YMTC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CGTN]
바이든 대통령은 “손가락보다 작은 반도체가 스마트폰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경제 근간을 이루고 있다”며 “30년 전에는 미국에서 전체 반도체의 30%가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과 한국, 유럽은 반도체 산업을 유치하고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왔다”면서 “하지만 미국이 돌아왔고, 앞으로 반도체 산업 미래는 미국에서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말 그대로 ‘반도체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선언한 셈이다.
중국 시안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미국이 이 법을 제정한 의도는 자국 주도의 반도체 생산과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시장 조사기관 IC인사이츠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 점유율은 대만(21.4%), 한국(20.4%), 일본(15.8%), 중국(15.3%) 순이다. 미국은 12.6%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10나노미터(㎚) 이하 최첨단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TSMC 두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이 법은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량을 늘려 대만과 한국 등 아시아 반도체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반도체 공급망 혼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반도체가 첨단산업의 핵심인 만큼 경제는 물론, 안보 측면에서도 반드시 반도체 패권을 차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 보조금 받는 기업, 중국 투자 못 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자리한 삼성전자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 [삼성전자]
이런 내용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공장, 쑤저우에 패키징 공장을 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생산 공장, 다롄에 낸드 공장, 충칭에 패키징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시안 공장은 삼성전자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40%를, 우시 공장은 SK하이닉스 전체 D램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앞으로 중국 공장에 더는 투자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난징 공장에서 16㎚ 반도체를 생산하는 TSMC는 이 법 때문에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모든 반도체 장비업체에 14㎚ 공정보다 미세한 제조기술이 적용된 장비에 대해 대중(對中) 수출 금지 조치를 내렸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10㎚ 공정 기술만 수출을 제한해왔는데, 이번에 14㎚로 변경한 것은 중국 반도체 제조를 좀 더 강력하게 막으려는 의도다. 미국 정부는 또 자국산 낸드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수출 제한 검토 대상은 128단 이상 고성능 낸드플래시 생산에 쓰이는 반도체 장비다. 이 경우 중국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 미국 정부는 이와 함께 반도체 소재용 다이아몬드와 산화갈륨, GAAFET(가펫) 구조 반도체 전자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 가스터빈엔진 가압연소기술 등 4종의 품목을 수출 통제 목록에 올렸다. 3㎚ 이상급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가펫 EDA 수출을 금지한 것은 중국의 반도체 생태계를 통째로 흔들 수 있는 ‘비수(匕首)’와 같은 조치다. EDA는 반도체 칩 자체 구조와 기능에서부터 생산 방식, 검증까지 전체 과정을 설계할 때 쓰인다. 다이아몬드와 산화갈륨은 고온·고전압을 견딜 수 있는 차세대 반도체의 핵심 소재다.
中 반도체 시장 70% 차지하는 삼성과 SK
특히 미국 정부는 한국에 일본과 대만이 참여하는 ‘칩(chip)4’ 동맹의 일원이 될 것을 유도하고 있다. 미국 측 의도는 자국을 중심으로 4개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해 중국을 견제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보복으로 시장을 잃을 것을 우려하는 윤석열 정부는 칩4 동맹 예비회의에 참여하기로 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있다. 중국이 보복 운운하는 이유는 한국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가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이 미국의 칩4 동맹에 적극 참여할 경우 중국으로선 상당한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홍콩 영자지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는 중국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의 칩4 동맹 참여를 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빼고선 중국이 ‘2025년 반도체 자급률 70%’ 목표를 달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중국은 반도체 자급률을 계산할 때 자국 내에서 생산하기만 하면 그 기업이 중국 기업인지, 외국 기업인지 따지지 않는다.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2011년 12.7%에서 2020년 15.9%, 2021년 16.1%로 올라갔다. 자급률이 상승하긴 했지만 2025년 70%와는 아직 거리가 너무 멀다. 특히 한국과 대만 기업 등을 제외하고 중국 기업들의 비중은 지난해 기준 6.6%에 그쳤다. 메모리 부문에선 선두주자로 꼽히는 YMTC(창장메모리)의 기술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2세대 뒤처져 있고 시장점유율도 미미한 상황이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의 70%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대체할 기업은 없다. 이 때문에 한국은 중국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는 투자하지 않으면서 ‘현상 유지’ 정도만 하면 된다. 글로벌 시장분석업체 글로벌데이터의 조지프 보리 연구원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 확대를 고려하면 한국이 중국에서 반도체 시장점유율을 유지할 기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이 오히려 우려할 점은 미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를 석권하는 것이다. 한국으로선 반도체 산업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권이 힘을 모아 지원하는 등 ‘초격차’ 기술력을 개발하는 것만이 생존 전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