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1

2007.04.17

‘미드’ 열풍 숨은 주역 인터넷 자막맨

현지 방송 즉시 번역 후 글씨 넣기 작업 P2P와 웹하드 통해 마니아에게 제공

  • 손주연 자유기고가

    입력2007-04-11 19: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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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 열풍 숨은 주역 인터넷 자막맨

    국내에 ‘석호필’(오른쪽) 열풍을 일으킨 ‘프리즌 브레이크’.

    금요일 오전 11시. 디시인사이드(www.dcin side.com)에선 ‘미드’(미국 드라마)클럽 ‘그레이 아나토미 갤러리’(이하 그갤)의 자막팀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캐나다에서 ‘그레이 아나토미’가 방영되는 시간이기 때문.

    오전 11시25분. 현지에 있는 자막팀원 ‘깜’이 ‘새 에피(에피소드) 시청 중’이라는 글을 띄운다. 현지에서 방영이 끝나고 한 시간쯤 지나면 드라마와 영화 등을 공유하는 P2P 사이트 토런트(Torrent.영화, 드라마, 게임 같은 파일들을 공유하는 P2P 프로그램)에 영상이 올라온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1시가 조금 넘으면 영상 내려받기도 끝난다.

    국내팀이 영상을 감상하는 동안 ID가 ‘jane doe.’인 누리꾼이 녹화해둔 영상을 돌려보며 받아쓰기(dictation) 작업을 한다. 조금씩 완성된 게시물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누구랄 것도 없이 작업에 매달린다. 부분 번역이 이뤄지고, 자막을 동영상에 집어넣는 ‘싱크 넣기’가 진행된다. 에피소드 한 편이 완성되는 사이 이들이 만든 게시물의 수는 80여 개. 피드백 게시글에는 13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14시간에 걸친 작업을 마치자 시계는 새벽 1시30분을 향하고 있다.

    아시아에는 한류 열풍이 분다지만, 국내 안방극장에선 ‘미드’ 열풍이 뜨겁다. 케이블TV에서는 미드가 넘쳐날 지경이고 지상파에서도 미드를 보기가 어렵지 않다.

    얼마 전 ‘그레이 아나토미2’를 끝낸 KBS는 새로운 미드를 준비하고 있고, MBC는 ‘CSI 마이애미4’를 방송 중이다. 여기에 SBS가 5월부터 ‘프리즌 브레이크’를 방송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지상파 채널을 통해 소개된 미드는 ‘그레이 아나토미’와 ‘CSI’를 비롯해 ‘로마’ ‘커맨더 인 치프’ 등으로 모두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은 시리즈들이다.



    열풍의 증거는 많다. 2월19일, 케이블 채널 수퍼액션에서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설날 특집으로 ‘프리즌 브레이크’를 21시간 연속 방영한 것. 수퍼액션은 그 전에도 드라마 ‘24’를 연속 방영해 큰 효과를 얻었다. 이날의 승부수도 적중했다. 전체 시청률이 1.18%나 나온 것이다. 채널 평균 시청률의 2~3배를 얻은 수퍼액션은 97개 채널 중 1위를 차지했다.

    ‘프리즌 브레이크’ 등 모든 유명작 이들 손 거쳐

    그리고 3월23일 ‘석호필’(웬트워스 밀러,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 역을 맡았다)이 내한했다. 수많은 팬들이 그를 보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기자회견장으로 몰렸다. 인터넷 게시판과 블로그가 온통 석호필로 도배되다시피 하자 언론은 ‘미드 열풍’에 대한 분석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드 열풍은 지상파에 대한 의존도가 유달리 심한 우리나라에서 TV를 보지 않고도 트렌드세터가 될 수 있음을 뜻하는 의미심장한 지표다. 지상파에서 인기를 끈 뒤 인터넷에 열풍이 이는 것과 달리, 인터넷에서 먼저 인정받은 후 지상파로 역편입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터넷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한글 자막과 내용 감수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자발적 누리꾼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P2P와 웹하드를 통해 실시간으로 배포되는 미드에 한글 자막을 입혀 국내 마니아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활동 중인 자막 동호회에는 디시인사이드의 ‘미드갤’과 네이트의 ‘드라마 24’ ‘NSC’, 다음의 ‘미국 드라마 24시’ 등이 있다.

    ‘미드’ 열풍 숨은 주역 인터넷 자막맨
    국내에 미드 동호회가 처음 생긴 것은 ‘프렌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2000년대 초반이다. 코리아닷컴(www.korea.com)에 만들어진 카페 ‘프렌즈’는 시트콤 ‘프렌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곳.

    네이트(www.nate.com)의 NSC를 운영하며 ‘하우스’와 ‘넘버스’ ‘로 앤 오더 : SVU’ ‘프리즌 브레이크’ 등의 자막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아무개’는 “코리아닷컴의 클럽들에 광고 배너가 너무 많이 떠서 불만이 거세질 무렵 네이트닷컴에서 적극적으로 클럽을 지원해 새로운 미드 클럽들이 네이트에 많이 생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미드’ 열풍 숨은 주역 인터넷 자막맨

    ‘미드’ 자막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미드클럽 누리꾼 'hobbes2'(왼쪽)와 'ㅈ'.

    현재 네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클럽으로는 ‘ND24’를 비롯해 ‘CSI 클럽’ ‘NSC’ ‘Veronica Mars’ 등이 있다. 아무개의 설명에 따르면 네이트에 마련된 첫 번째 미드 클럽은 ND24였다. ND24는 키퍼 서덜랜드가 주인공 잭 바우어로 출연하는 드라마 ‘24’의 마니아들이 만들었는데 ‘24’를 비롯해 ‘닙/턱’ ‘웨스트 윙’ ‘라스베이거스’ 등 수십 편의 자막을 제작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CSI 클럽’은 ‘CSI’와 ‘WAT’만 전문적으로 다루기 위해 ND24에서 독립한 클럽이며, NSC는 ND24와 CSI 클럽에서 다루지 못했던 수사·법정·의학 드라마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곳. ‘Veronica Mars’는 동명의 드라마 ‘Veronica Mars’에 집중하고자 만든 클럽이다.

    이 중 NSC는 자막팀 인원(50명)을 가장 많이 두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받아쓰기영문자막(싱크)-한글 번역-번역 수정-한글 교정의 과정을 거쳐 자막을 완성한다. NSC 자막팀 나인지도의 “우리말을 잘 구사한 자막이 최고의 자막”이라는 이야기는 NSC 자막의 특징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NSC는 어느 클럽보다 피드백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클럽 홈페이지에 따로 피드백 방을 마련해놓고 자막을 내려받은 이들이 전하는 따끔한 충고를 흘려듣지 않는다.

    자막 작업에 어느 클럽보다 공을 들이는 까닭에 NSC의 자막은 길게는 한 달에서 짧게는 1~2주 걸린다.

    “각자에게 에피소드를 정해주고, 기한을 알려주는 시스템입니다. 받아쓰기와 번역 수정, 교정은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하도록 노력하는 편이죠. 번역에 시간을 넉넉히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 개인이 만드는 자막보다는 좀 오래 걸립니다.”(누리꾼 ‘fithele’)

    각 클럽이 추천하는 베스트 ‘미드’



    ‘NSC’ 추천

    로 앤 오더 SVU : 엘리트 형사로 구성된 뉴욕경찰 성범죄 전담반의 활약을 그린 수사물. ‘로 앤 오더’의 스핀오프 시리즈.

    로 앤 오더 CI : 강력범죄가 많은 뉴욕에서 특수수사대가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 범인의 범행동기를 분석해 법적 공방을 벌이며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특징.

    NCIS : 해군 관련 범죄를 수사하는 실존 기관의 이름을 바탕으로 한 시리즈. 개성 있는 캐릭터와 시청자를 몰입시키는 반전이 돋보이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음.

    ‘그레이 아나토미 갤러리’ 추천

    스크럽스 : 의대를 갓 졸업한 인턴들이 병원에서 겪는 내용을 코믹하게 다룬 시리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원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잘 보여줌.

    배틀스타 갈락티카 : 종말 위기에 처한 5만명의 생존자들이 전투함 갈락티카에 탄 채 예언에 나오는 행성 ‘지구’를 찾아 떠도는 이야기. SF 드라마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

    히어로즈 : 특별한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영웅담. 초능력을 지닌 11명의 시민들이 미래에 벌어질 뉴욕 핵폭발을 막기 위해 분전하는 내용.



    방송사들도 동호회 의견 살펴 드라마 평가

    디시인사이드의 ‘미드갤’은 다른 사이트의 클럽들과는 운영 형식이 조금 다르다. 자막팀을 따로 구성하기보다 ‘개인’이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기 있는 작품들은 자체적으로 자막팀이 꾸려지기도 했다. ‘그레이 아나토미’와 ‘프리즌 브레이크’ 갤러리가 그 예.

    이것이 ‘그갤’ 자막팀과 NSC의 자막 제작 시스템에 차이가 있는 이유다. NSC가 모든 작업을 세분화해서 개인이 전담하는 쪽이라면, ‘그갤’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한다. ‘그갤’ 자막팀의 ‘ㅈ’은 “이런 차이는 NSC와 그갤이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NSC가 자막의 퀄리티를 중시한다면 그갤은 신속도를 우선시한다”고 설명했다.

    ‘ㅈ’은 자신들의 작업 형태가 일종의 플래시몹(flash mob·e메일이나 휴대전화 연락을 통해 약속장소에 모여 아주 짧은 시간 황당한 행동을 한 뒤 순식간에 흩어지는 불특정 다수의 군중-‘네이버 백과사전’)과 같다고 설명했다. 현지에서 ‘그레이 아나토미’가 방영된 뒤 동영상이 국내에 들어오면 모여서 함께 자막 작업을 하다 다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플래시몹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취재를 위해 네이트온 메신저에서 만난 그갤 자막팀원들은 다른 어느 클럽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여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서로의 실명을 알지도, 오프라인상에서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직장인인 이들 NSC와 그갤 자막팀은 없는 시간을 쪼개며 왜 이런 고된 작업을 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미드’는 국내 드라마와 다른 흥미진진함과 완성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터넷의 미드 열풍이 언제까지 갈지는 불투명하다. 사실 그동안 방송사들은 인터넷에서 돌고 도는 드라마에 대해 묵인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방송사는 ‘드라마 다시 보기’도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고, 저작권법을 내세우며 ‘어둠의 통로’ 단속에 들어섰다. P2P 사이트 토런트의 대표 브랜드 비트 토런트가 유료화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와 관련, 각 클럽의 입장은 대체로 비슷했다. DVD로 발매된 작품의 경우 클럽에서 유통되는 동영상과는 소스가 다르기 때문에 국내 저작권법과 거리가 있지만, 업로드를 하지 않는다는 게 암묵적 원칙이다. 그리고 저작권에 대한 기준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각 방송사의 구매담당자들이 수많은 외국 드라마 가운데 ‘미드 인터넷 동호회의 의견을 살펴’ 옥석을 가려왔다는 점에 비춰보면 방송사들이 누리꾼의 의견에 귀 기울일 정도의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tips

    자막 제작 관련 용어


    받아쓰기(dictation) :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를 지문으로 옮기는 일.

    싱크(sink) : 영상에 자막이 오르도록 하는 과정. 문장을 끊고 배치해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 키포인트.

    싱크 번호(sink number) : 싱크에 매겨지는 고유번호. 자막 앞에 135971, 이런 식으로 붙는다. 숫자 1은 1000분의 1초를 의미한다.

    피드백(feedback) : 의견을 교환하며 최종 오류를 고쳐나가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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