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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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 연애의 10단계

소설 ‘로맨틱 무브먼트’ 주인공 심리 분석 … 갈망·끌림·애착·싫증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 입력2006-06-14 14: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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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애 심리를 냉정하게 분석해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의 ‘로맨틱 무브먼트(The Romantic Movement)’는 ‘몬순’ 같은 연애의 변화무쌍한 순간순간을 포착한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앨리스와 에릭의 연애는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심리학적 & 진화생물학적으로 정리한 ‘로맨틱 무브먼트’ 10단계.
    앨리스는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소호의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여성.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반쪽을 만나게 되는, 영혼의 결합 같은 ‘관계’를 원한다. 물론 번듯한 집과 비싼 옷, 남국에서의 바캉스와 같은 물질적 욕구도 있다. 금융전문가인 에릭은 겉으로 보기엔 잘 정돈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남보다 무질서해질까 두려워 전화선이 꼬이거나 리모컨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꼴도 참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여자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바로 비싼 선물로 ‘갚아버린다’.

    1_ 앨리스는 파티에서 에릭을 만난다. 그가 롤빵을 자르는 모습, 포크를 다루는 동작이 관능적이라고 생각하며, 경계한다. ‘너무 빨리 넘어가면 헤퍼 보일 수 있고, 너무 미적대면 상대가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연애경제학에서는 인플레가 유용하다. 이 단계에서 앨리스가 무관심한 척하면 상대는 초콜릿을 사고, 사랑의 시를 쓸 것이다.

    2_ 에릭이 앨리스를 진심으로 이해 한다는 반응을 보이자, 이번엔 앨리스가 마음을 바꾼다. 첫 번째 섹스에서 두 사람이 그동안 가졌던 섹스의 역사가 만난다. 앨리스는 에릭이 자신의 성생활 역사의 마지막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에릭은 앨리스의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3_ 편지가 오가고, 밤늦도록 전화 통화가 이어지고, 앨리스의 집에 꽃다발이 배달된다. 앨리스는 잘생긴 남자와 팔짱을 끼고 강변을 걷는 기쁨을 만끽한다. 욕망은 사소한 실마리에서도 피어났고, 공백을 메우고자 상상력이 발휘된다.

    4_ 욕망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자율적인 판단, 다른 하나는 ‘다들 그렇다니까 나도’라는 모방심리. 앨리스가 에릭에게 끌린 데는 그가 다른 여자들이 보기에도 매력적이라는 사실도 작용했다. 다른 여자에게서 선물받은 넥타이가 100개쯤 되는 남자는 타이가 하나뿐인 남자보다 가치 있었다. 에릭은 자신의 넥타이 중 판촉물로 받은 것이 꽤 많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5_ 앨리스와 에릭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인 북온대에서는 아열대성 기단과 아한대성 기단이 충돌해, 폐색전선으로 불안정하게 합쳐진다. TV에 몰두한 에릭만 바라보던 앨리스에게 에릭은 “제발 나 좀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처음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짜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예의를 챙기지 않았다. “나 좀 내버려두라”는 말은 ‘나’를 주장한다는 의미다.

    6_ 에릭은 여자 친구를 동시에 몇 명씩 유지하고, 어느 집단이 등을 돌려도 생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여러 집단과 교제하는 등 건물의 하중을 여러 기둥에 분산할 줄 아는 지성파 건축가다. 그러나 앨리스는 모든 욕구를 기둥 하나에 집중시켜 그 기둥이 전체 무게를 견뎌내길 바란다.

    7_ 앨리스가 에릭에게 “당신이랑 있어서 편안하다”고 말하자 에릭은 “오늘 007 영화가 몇 시에 하지?”라고 묻는다. 그 순간, 권력의 균형이 에릭 쪽으로 확 쏠린다. 앨리스는 사랑의 게임에서 패를 다 잃었다.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게 마련이라는 비관적 견해를 밝힌 바 있다.

    8_ 앨리스는 에릭이 내켜하지 않으므로 필립이란 남자의 차를 얻어 타고 골동품 시장에 간다. 앨리스는 문득 자신이 옆에 있는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필립은 완벽한 외모의 여의사와 사귀다가 그녀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분명한 느낌을 받고 헤어진 뒤였다.

    9_ 어느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앨리스와 에릭. 앨리스는 에릭이 콩 요리를 떠서 담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 남자가 평범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이 한동안 합치됐던 것은 넓고 갈림길이 많은 길에서 일어났던 우연의 일치였을 뿐. 에릭이 줄 수 있는 것이 앨리스에게 더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10_ 어느 토요일 앨리스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에릭을 찾아왔고, 커피와 죽음의 냄새가 공기 중을 떠돌았다. “이런 이야기는 오래 끄는 게 좋지 않죠. 에릭, 우린 끝났어요.”앨리스는 종지부를 찍었으나 혼란스런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앨리스는 친구에게 말한다. “내가 진짜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친구는 대답한다. “네가 그리워하는 건 사랑이지.”

    과학으로 풀어본 연애의 심리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연애가 ‘뻔한’ 스토리일지라도 우리는 쉽게 빠져들고 공감한다. 최근 과학자들은 경쟁하듯 사람의 몸과 뇌, 연애와 사랑의 관계를 연구해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놓고 있다.

    현대의 ‘연애 남녀’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알랭 드 보통의 장편소설 ‘로맨틱 무브먼트’(The Romantic Movement, 우리말 제목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주인공 앨리스는 파티에서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난다. 그의 이름은 에릭이다. 금융전문가인 그는 빵을 자르고 포크를 다루는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관능적’이고 얼굴까지 잘생긴 ‘킹카’다. 에릭이 다른 여자에게서 선물 받은 넥타이가 족히 100개는 된다(고 앨리스는 믿는다). ‘경쟁 상대’인 다른 여자들이 보기에도 에릭은 매력적인 남자일 테니 말이다. 앨리스 역시 에릭에게 마음이 끌린다.

    흥미롭게도 사람과 같은 포유류인 생쥐 역시 ‘검증된’ 이성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생쥐는 배우자를 고를 때 냄새를 맡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 미국 록펠러대학 신경생물학자인 도널드 파프 교수팀은 암컷 생쥐를 두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에는 혼자 있던 수컷 생쥐의 냄새를, 또 한 그룹에는 다른 암컷과 함께 있던 수컷의 냄새를 맡게 했다. 그 결과 암컷이 다른 암컷과 함께 있던 수컷의 냄새를 더 좋아했다. 파프 교수는 “암컷 생쥐가 다른 암컷의 냄새가 섞여 있는 수컷을 ‘검증된’ 배우자감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시간이 흘러 ‘로맨틱 무브먼트’의 새로운 단계에 이른다. 앨리스의 눈에 에릭의 장점이 더 이상 매력으로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온 것이다. 고민 끝에 앨리스는 이별을 선언한다. 남녀의 사랑이 뇌와 생식기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따라 3단계를 거친다는 주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미국 럿거스대학 인류학자인 헬렌 피셔 교수가 이런 주장의 선두주자다).

    즉, 앨리스가 에릭을 처음 만났을 때는 ‘갈망’ 단계로 생식기능과 성적 욕구에 관여하는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이 활발히 분비된다. 연애의 시작이다.

    앨리스와 에릭이 팔짱을 끼고 강변을 거닐며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즐기는 시기는 ‘끌림’ 단계다. 자신감을 주는 도파민, 홀린 듯한 느낌을 주는 페닐에틸아민, 평온함을 주는 엔도르핀, 육체적 쾌감을 느끼게 하는 노르에피네프린이 뇌와 온몸에 넘쳐난다.

    그러나 두 단계에서 남녀 모두 2년 정도 지나면 호르몬이 정상 수치로 되돌아온다. 과학적으로 볼 때 열정적인 사랑의 수명은 3~4년을 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앨리스는 이별 뒤 한 친구에게 “내가 진짜 그리워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남자 필립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아마 이때쯤 앨리스의 몸에서는 ‘갈망’ 단계의 호르몬이 다시 분비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랜 연애 시기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하는 커플은 어떻게 사랑을 지속할 수 있을까. 피셔 교수는 “서로의 관계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분비되는 ‘애착’ 단계로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주인공 동진(감우성 분)과 은호(손예진 분)는 이혼한 뒤에도 서로에 대해 애틋한 감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이 바로 사랑의 마지막 단계까지 경험한 커플일 것이다.

    물론 아무하고나 사랑에 빠지고 ‘애착’ 단계까지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경우는 있다. 사람들은 흔히 첫사랑이나 옛 애인과 닮은 이성을 만나면 가슴이 뛴다. 말 그대로 ‘소울메이트’를 만난 흥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드라마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승희(김래원 분)도 복실(정려원 분)을 처음 본 순간 숨이 멎을 듯 그 자리에 못 박혀버린다. 세상을 떠난 옛 애인 혜수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캐나다 콘코르디아대학 심리학자인 짐 파우스 교수는 그 이유를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애착’ 단계의 옥시토신이 활발히 분비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옥시토신이 상대방의 어떤 특징에 특히 매력을 느끼게 해 같은 타입의 이성을 계속 만나고 싶도록 유도한다는 것. 연애소설이나 멜로드라마가 ‘뻔한 줄거리’가 되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과 호르몬 때문인지 모른다(그러니 작가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성들 사이에서 인기 좋은 ‘킹카’나 ‘연애 선수’에게 마음을 뺏겨 고민 중이거나 첫사랑과 닮은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할까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조언 한 마디가 ‘연애의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당신의 마음은 과학적으로 타당하답니다.”

    ■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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