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2

2006.04.25

강제 할당 ‘반비(班費)’… ‘집단 촌지’변질

학기 초 불법찬조금 여전 … 물렁한 단속, 그릇된 자식 사랑 합작품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6-04-19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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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 할당 ‘반비(班費)’… ‘집단 촌지’변질
    서울 마포구의 A(42·여) 씨는 올 3월 새 학기를 맞아 고민에 빠졌다.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아이(3학년)의 담임교사에게 어떤 방식으로 ‘성의’를 표시해야 할지 난감해진 것. 학급 간부를 맡은 1, 2학년 때는 아이의 친구 엄마 2명과 10만원씩 내서 30만원을 만든 뒤 학기 초와 스승의 날, 크리스마스 3차례에 걸쳐 총 90만원의 ‘집단 촌지’를 건넸다. ‘기본 30만원, 고급 50만원’이라는 사립 초등학교 촌지 액수에 부담을 느낀 끝에 개발한 이 아이디어(?)는 그러나 곧 다른 반 학부모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돼버려 ‘촌지로서의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A 씨는 올해는 좀더 ‘차별화’된 방법을 찾고 있다.

    서울 강남구의 B(40·여) 씨는 3월 학급 간부로 선출된 초등학교 6학년 딸이 간부 자리를 맡지 않겠다고 해 깜짝 놀랐다. 이유는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란 것. 딸이 학급 간부를 맡은 1학년 때는 한 학기에 20만원, 3학년 때는 30만원씩 학부모회를 통해 낸 적이 있는 B 씨로선 아이의 말에 우리 교육 현실의 서글픈 단면을 엿본 것 같아 새삼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B 씨는 현재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교사들의 2박3일 현장학습을 위해 45만원을 낸 경험이 있다. 거둬진 돈은 교사들의 간편복과 모자, 신발 구입에 쓰였다. 교사가 냉장고가 필요하다고 해 돈을 낸 적도 있다.

    B 씨가 냈던 돈의 명목은 이른바 ‘반비(班費)’. 학부모와 교사 간에 일대일로 건네지는 일반적인 촌지와 달리, 학부모 다수가 거둬 내는 불법찬조금이다. 반면 A 씨의 사례는 ‘반비’의 개념을 차용해 변칙적인 촌지를 건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반비의 촌지화’인 셈이다.

    날마다 2~3건 제보 들어와

    세칭 ‘반비’로 통하는 불법찬조금 문제가 심각하다. 앞서 보았듯, ‘집단 촌지’로도 변모하고 있다. 불법찬조금 근절 및 학교발전기금 폐지운동을 벌이고 있는 (사)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이하 참교육학부모회)의 ‘2005년 시·도별 불법찬조금 신고접수 현황’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이 단체에 접수된 불법찬조금 조성 사례는 무려 324건(초등 112, 중등 65, 고등 103, 미분류 41, 기타 3건). 지역별 차이는 다소 있지만,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올 들어서도 참교육학부모회 ‘불법찬조금 신고센터’엔 학기 초를 맞아 날마다 2∼3건가량의 제보가 끊이지 않는다.

    2005년 신고 사례들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불법찬조금의 유형은 다양하다. ‘학교발전기금’ 이름으로 모금하는 경우를 비롯, 학교운영위원회 회비, 학급 대의원 회비, 어머니회 등 자생모임의 회비, 야간자율학습 학생을 위한 간식비 및 교사 수고비 등이 그것이다. 찬조금 액수는 학생 1인당 2만원에서 30만원 정도. 일부 사립 특목고의 경우 100만원에 달하기도 한다. 학교 전체로는 통상 수백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른다. 찬조금의 용도는 초·중학교의 경우 학급비품 구입 및 행사비, 간식비, 교사 회식비, 학교 시설비가 주를 이룬다. 고등학교는 야간자율학습 감독비 및 간식비, 학교 시설비로 사용된다.

    찬조금은 학부모 단체의 총무 명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경우가 많지만, 요즘은 적발을 우려해 흔적이 남지 않는 현금이 선호된다. 2004년 대전의 한 학교에서는 학생의 할머니 통장이 차명계좌로 이용되기도 했다.

    찬조금 조성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의 학교발전기금 조성방법 및 운영방안에 위배되는 불법행위. 학교발전기금의 목적, 기금의 규모와 조성방법, 시한 등에 대해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치지 않은 채 학부모회 등 자생단체가 임의로 모금을 강제한 뒤 거둬들인 돈을 엉뚱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발전기금제도 도입 당시부터 학교발전기금을 빙자한 불법찬조금이 기승을 부리고, 학교공동체에 위화감을 조성할 것이 예견돼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2005년 임시국회에서 학교발전기금 폐지를 위한 법안은 폐기돼버렸다.” 참교육학부모회 박범이 교육자치위원장은 “불법찬조금의 가장 큰 폐해는 학부모의 학교 참여 활동이 돈 없인 불가능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낳고, 이렇게 조성된 찬조금으로 자신의 아이에 대한 특별대우를 바라는 이기주의가 확산되는 데 있다”고 꼬집는다.

    임의로 모금해 엉뚱한 용도로 사용

    1998년 도입된 학교발전기금제도는 공교육 과정에 포함돼 있지 않은 다양한 방과 후 교육의 예산 확보를 위해 학부모에게서 일부 예산을 거두는 것. 하지만 일부 학교들이 교육재정 부족을 이유로 발전기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이를 빙자한 불법찬조금까지 횡행하게 됐다.

    불법찬조금에 대한 교육당국의 단속이 없는 건 아니다.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각 시·도 교육청에 불법찬조금 단속활동을 맡기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감사담당관실에 따르면, 2005년 불법찬조금 조성으로 교육청의 조사를 받은 학교는 53개 고교(초·중학교는 서울시교육청 산하 11개 지역교육청에서 담당). 조사를 받은 거의 모든 학교에 시정, 반환, 주의, 징계, 경고 등 행정·재정·신분상 처분이 내려졌다. 서울시교육청은 또한 4월12일 현재 Y여고 등 서울 시내 6개 고교에 대해 불법찬조금 조성 관련 조사를 끝냈거나 진행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신학기를 맞아 불법찬조금 근절을 계도하는 공문을 일선 고교에 발송하는 한편, 3월 서울 시내 모든 고교를 방문해 불법찬조금 사전 예방을 위한 설명회도 열었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불법찬조금을 거두지 않는 학교도 점차 늘고 있다. 경기 성남시 분당의 모 고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을 둔 주부 C(45) 씨의 말이다. “아들이 2학년이던 지난해엔 30만원의 ‘반비’를 일시불로 냈는데 올해는 학교 측이 찬조금을 안 받겠다고 해서 한시름 놓았다. 그래도 혹시나 더욱 음성적으로 요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다. 아들이 학급 간부여서, 만일 ‘반비’를 거두게 되면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학교 단위에서 교장이나 교사가 적극적인 의지만 갖는다면 불법찬조금은 추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법찬조금이 뿌리 뽑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교육당국의 물렁한 단속에 있다. 실제로 참교육학부모회가 3월 불법찬조금 조성 제보를 받고 교육부에 감사를 청구한 강원 속초시의 한 초등학교 경우 관할 교육청 장학사가 제보자의 신원을 해당 학교에 알려주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마저 벌어졌다.

    강제 할당 ‘반비(班費)’… ‘집단 촌지’변질

    참교육학부모회 홈페이지의 ‘불법찬조금 신고센터’.

    참교육학부모회 관계자는 “2005년에도 천안교육청 측이 제보자 신분을 공개해 해당 학부모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적이 있고, 교육장이 ‘감사가 나오면 학교 입장에서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등 감사기관이 되레 피감기관을 감싸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 행태를 보인 사례도 있다”며 “교육당국의 불법찬조금 근절 의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러니 학교 측도 불법찬조금 문제가 발생하면 ‘돌려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응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부 학부모의 그릇된 자식 사랑도 불법찬조금 추방에 찬물을 끼얹는다. 학군, 학원, 문화인프라의 삼박자를 다 갖춘 서울 강남구 대치동. 그곳에 사는 40대 주부 D 씨의 이야기다.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는데도 기를 쓰고 학급 간부를 시키려는 엄마들이 꼭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내 딸의 친구 엄마가 그랬다. 학부모 총회 때 보니 “타워팰리스에 산다. 남편 직업이 교수다”며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더라. 한눈에도 담임교사의 시선을 붙들기 위한 행위로 비쳤다. 학부모 단체 임원을 뽑을 때 교사들이 “첫째 아이 엄마만 손드세요”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첫아이에게 많은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 대치동의 모 고교는 타워팰리스나 동부센트레빌 등 고급 아파트에 사는 학생이 많이 다녀 찬조금 액수가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과 후 야간자율학습 대신 입시학원행을 택하는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은 학교이니 거둬진 찬조금이 교사들의 촌지 용도로 쓰일 건 뻔하지 않은가.”

    이처럼 일부 학부모들이 ‘자식을 볼모로 한’ 찬조금 조성을 주도하면 다른 학부모 역시 자신의 아이가 ‘반사적 불이익’을 당할까봐 반강제적인 모금에 ‘울며 겨자먹기’로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래저래 학부모만 죽을 맛

    양심적인 교사가 적지 않지만, 불법찬조금엔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한다. 한 고교 교사의 귀띔. “많은 교사들이 찬조금을 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교사가 그러지 않는 한 학부모가 챙겨주면 안 받을 수도 없다. 혼자서 안 받겠다고 나섰다간 ‘튀는 놈’으로 찍힐 수 있어서다.”

    불법찬조금 모금 창구 역할을 하는 학부모 단체에 대한 강제해산도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일부 교육청에서 학교장이 물의를 빚은 자생단체의 해산을 권유하거나 강제해산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교육부 지침을 근거로 불법찬조금을 모금한 학부모 단체를 강제해산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지만, 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서울시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교육당국이 강제해산을 권고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다수 학부모 단체가 자생적이고 임의적인 성격을 띠는 만큼 스스로 해산하지 않는 한 실익이 없다”고 털어놨다.

    국가청렴위원회는 1월 ‘교육분야 불법찬조금 근절을 위한 제도개선안’에서 제도의 투명성과 교원의 윤리의식 및 책임을 강화하는 개선안을 교육부와 각 시·도 교육청에 권고했다. 그러나 학부모, 교사, 학교 등 교육 주체의 자정 노력이 함께 이뤄지지 않는 한 불법찬조금이란 그릇된 관행의 근절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늘어만 가는 사교육비에 더해 강제 할당되는 불법찬조금에 이래저래 학부모들만 죽을 맛이다. 누구나 한때 학생이었는데도 말이다.

    불법찬조금 조성 사례

    “학부모 총회 갔더니 돈 내라 … 어디에 쓰는지 아무도 몰라”


    서울 노원구 ○○중학교 사례 “봉사단체와 학부모회, 어머니회가 있다. 학부모회와 어머니회에서 회비를 걷는데, 이 회비로 교사 회식비·노래방값·술값, 명절 때 교장과 교사에게 20만원씩 상납한다. 지난해엔 10만원씩 걷었는데 적발돼서 돌려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는 걷지 않겠지 하고 회원으로 가입했는데 또 걷는다. 가입하고 돈을 내도 한 번도 어떻게 썼는지 설명해주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회가 알아서 사용한다. 상도 임원 아이들이 받는다. 전체 돈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다. 학부모회장은 교장의 제자가 했다가 올해는 봉사단체 회장이 맡고 있다. 지난해엔 회비를 총무 통장으로 입금했는데 적발돼서 올해는 학년 대표에게 돈을 보내 나중에 취합한다. 이것도 혹시 모른다며 전화를 걸어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올해는 학부모회, 어머니회에 각 5만원씩 냈다.”

    경기 화성시 ○○초등학교 사례 “학부모 총회에 갔더니 방명록에 학년별로 아이 이름과 부모 이름을 적고 서명을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어떤 학부모가 ‘자모회비 2만원 있습니다’고 해 냈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참석한 학부모에게만 내라고 했단다. 지난해엔 권유였는데 많은 이들이 안 내니까 이젠 지켜보면서 내라고 한다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어디에 쓰는지 아는 학부모도 없었다. 이런저런 순서가 진행되고 주부교실과 학부모회가 올해부터 통합됐다면서 회비를 5만원씩 내라고 했다. 5만원 중 1만원은 주부교실 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들고, 나머지 4만원은 이리저리 쓸 데가 많다고 했다. 주부교실 회원이 270명이라는데 1000만원이 넘는 돈으로 뭘 한다는 건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그밖에도 학급에 한 달에 1만원 정도씩 또 내고 필요하면 더 걷는다고 한다. 많은 반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 주부교실은 뭐 하는 단체이고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인지, 사전에 묻지도 않고 무조건 하라면서 5만원을 내라고 한다.”

    (참교육학부모회에 제보된 2006년 불법찬조금 조성 사례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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