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2

2006.04.25

북한산 위폐 구하기 ‘식은 죽 먹기’

진폐와 똑같은 ‘슈퍼노트’ 북-중 국경 통해 유통 … 미국의 강도 높은 경제제재로 물량은 줄어

  • 곽대중 데일리NK 기자 big@dailynk.com

    입력2006-04-19 14:3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북한산 위폐 구하기 ‘식은 죽 먹기’

    경찰이 위폐를 감식기에 통과시키고 있다. 100달러짜리 슈퍼노트(작은 사진).

    “얼마나 갖고 있나?”(기자) “3만….”(북한 주민 K 씨) “확실한가?” “확실하다.” “얼마 뗄 건데?” “60만 쳐줘요.”

    최근 함북 무산군에서 중국 휴대전화를 통해 한국에 있는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밀수를 주업으로 하는 무산군 거주 북한 주민 K 씨. 얼마 전 ‘가딸러(위조달러를 가리키는 북한말)’를 구해달라고 부탁해놓은 데 대한 답이었다. 그가 함북 청진시에서 확보해놓은 위폐는 미화 3만 달러. “(품질이) 확실하냐”는 질문에 그는 “믿어도 좋다”고 자신했다.

    100달러 단둥으로 넘기는 ‘가딸러 놀이’

    북한이 유통시키는 위조 담배·가짜 비아그라·마약 등이 ‘쌈짓돈 수준’에서 이뤄진다면, 북한이 제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슈퍼노트(정교하게 위조된 100달러짜리 지폐)는 세계경제를 교란시키는 심각한 사안이다. 미국이 북한의 위조달러 제조 및 유통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고 있는데도 ‘북한산(혹은 북한에서 유통되는) 위폐’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위폐는 품질, 즉 위조의 정밀도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위폐는 시쳇말로 ‘줘도 안 먹고’, 어느 정도 진폐와 비슷하면 진폐 가치의 40%, 정교하게 제작된 위폐는 액면가 70%의 가치를 지닌다. 100달러짜리 슈퍼노트가 70달러에 사고 팔리는 것이다. 물건을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60만 쳐달라”고 한 걸 보면 K 씨의 위폐는 슈퍼노트급으로 추정된다.



    신의주엔 평양에서 수집한 위조달러를 중국 단둥(丹東)의 위폐 유통 조직에 넘겨 차익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평양에서 40~50달러에 거래되는 100달러짜리 위폐는 신의주에서 단둥으로 넘어가면서 55~60달러로 값이 오른다. ‘가딸러 놀이’라고 불리는 이 같은 사업은 자본을 끌어들여 위폐를 구한 뒤 거래에 나서면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실패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위폐를 만들 때 가장 구현하기 어려운 것은 ‘종이’다. 위조 방지기술은 대부분 모방이 가능하지만, 진폐와 똑같은 종이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달러를 많이 만져본 사람은 지폐를 흔들어보면 소리와 느낌으로 진위 여부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재질까지 완벽하게 구현한 초정밀 위폐는 이런 방식만으로는 감별이 불가능하다. 특히 진폐를 만드는 ‘국가’가 위조에 나섰을 때는 더욱 그렇다.

    북한에서 유통되는 위조달러는 색깔과 지질이 진폐와 차이가 없는, ‘종이의 벽’을 넘어선 초정밀 위폐다. 북한 주민을 통해 입수한 슈퍼노트 1장을 진폐 2장과 나란히 놓고 비전문가에게 “어느 쪽이 위폐처럼 보이느냐”고 물었다. 실험군 10여 명 중 위폐를 골라낸 사람은 2명뿐이었고, 사용된 흔적 때문에 새 돈인 위폐보다 낡아 보인 진폐를 위폐로 꼽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위폐를 가려낸 이들도 “새 돈처럼 너무 빳빳해서 역으로 위폐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통해 유통되는 위폐는 말 그대로 진폐를 능가하는 ‘슈퍼(super)’ ‘지폐(note)’인 것이다. 이들 위폐를 북한이 직접 ‘제조’했는지에 대해선 확언할 수 없지만 북한을 통해 ‘유통’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에 여러 정황을 덧붙여보면 북-중 국경을 통해 유통되는 슈퍼노트는 ‘북한산’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미국이 위폐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고삐를 조이자 북한은 “우리는 위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도 위폐의 피해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이 대북 금융제재를 하고 있어 국제 금융기관을 통해 결제를 할 수 없다. 따라서 현금을 주고받는데 그 가운데 위폐가 끼여 있어서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북 “위폐 연루 내국인 엄벌” 몸 웅크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 일부도 “북한에 위폐가 많은 것은 인정하지만 위폐를 만들지는 않는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중반 극심한 식량난을 거치면서 북-중 간에 밀수가 성행했는데(북한은 일본의 중고 자동차를 중국으로 밀수출하는 불법 중계무역의 통로였다) 이 같은 불법적 활동에는 당연히 위조달러가 끼어들게 마련이고, 달러화를 접해보지 못한 북한 무역상이 위폐에 속아 위폐가 창궐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교관 신분증을 가진 북한 사람들이 위조달러를 수십 다발씩 소지하거나 환전하다가 적발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이 소지했던 위폐도 “무역거래 중 우연히 끼어들었다”고 해명할 수 있을까.

    미 당국자들은 “위폐 문제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면서 “북한은 슈퍼노트의 제조창이 틀림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북한의 국제 범죄활동을 추적해온 미 의회조사국의 한 관계자는 “중국 동북부 지방, 남아시아 일부, 아프리카 일부가 슈퍼노트의 유통 거점으로 포착됐는데, 이들 지역은 하나같이 북한과 가까운 국가의 영토”라고 말했다.

    범죄 집단이 위폐를 만들려면 시설과 장비를 구입하는 데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그러나 진폐(자국의 지폐)를 만드는 국가는 다르다.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다른 나라의 지폐를 위조할 수 있는 것. 북한이 의심받고 있는 이유도 국가적 지원을 받으면서 위폐를 제조할 수 있는 지역이 북한 외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의 압박이 날카로워지자 북한은 몸을 웅크리고 있다. 돈세탁 루트로 이용하던 마카오 소재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가 미국의 금융제재를 받자 북한은 “국제적인 반(反)자금 세척 활동에 적극 합류하겠다”(외무성 대변인 논평)면서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북한은 마약, 위폐 문제와 연루된 내국인을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포고문도 발표했다. 시범 케이스로 삼으려 했는지, 3월13일 함북 청진시에서 남자 2명을 공개 처형하기도 했다. 이들은 마약 밀거래와 위폐 유통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위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슈퍼노트로 인한 물적 피해(미국은 슈퍼노트가 유통되자 100달러짜리 지폐의 도안을 바꾸기까지 했다)를 줄이는 방안일 뿐더러, 대북 압박책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북한은 미국이 직접적인 경제제재에 나서자 유연한 태도를 취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행동 패턴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대북 제재 수위가 높아지면서 북한을 통해 유통되는 위폐가 크게 줄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럼에도 북한산(혹은 북한에서 유통되는) 슈퍼노트를 구하는 것은 여전히 ‘식은 죽 먹기’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