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7

2004.08.12

양심적 병역거부 심사부터 받는다

이스라엘 양심위원회가 의도 파악 … 면제 못 받으면 민간교도소서 보통 1년간 복역

  • 예루살렘=남성준 통신원 darom21@hanmail.net

    입력2004-08-05 17: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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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적 병역거부 심사부터 받는다

    이스라엘군의 훈련 장면.

    서울 남부지법의 이정렬 판사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나 대법원에서 다시 유죄판결을 내리자 ‘양심적 병역거부’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여부 심사가 남아 있지만 대법원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한 뒤의 대안, 즉 ‘대체복무’라는 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국가제도의 문제점이 발견될 때 우리보다 앞선 제도를 운영하는 선진국의 사례를 참고해왔다.

    그러나 서구 민주주의 국가 중 우리와 같은 의무복무제인 국민개병제도(國民皆兵制度)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에 각종 사안에 외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 좋아하는 지식인, 정치인들도 양심적 병역거부의 사례에서는 외국의 예를 끌어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서구화된 민주주의 국가로서는 드물게 우리와 같은 국민개병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참고가 될 듯하다. 이스라엘에서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병역의 의무를 진다.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간 복무하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만 18살이 되면 이스라엘 방위군(IDF)에 징집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학 진학은 군 복무 뒤에야 가능하다. 인구가 적은 이스라엘에서는 예비군이 현역보다 군 전력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병의 경우 연간 30일, 장교는 45일을 복무하며 비상시에는 기간이 연장되고 필요에 따라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기도 하는데 현 IDF 참모총장인 모세 아얄론 또한 예비역 장성이었다가 참모총장으로 복귀한 경우다. 이스라엘의 예비군은 시간 때우다 도장 찍고 돌아가는 우리나라 예비군과 달리 늘 실제 군사작전에 투입된다. 이번 인티파다(봉기•2000년 9월 발발) 기간 중 사망한 IDF의 대다수 군인이 예비군이었다.

    비인도적 군사작전 거부감 확산

    이스라엘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미 1982년 레바논 침공(제5차 중동전쟁) 때 조직화된 사회운동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 전쟁을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고 반대하던 군인들이 ‘예쉬 그불(한계가 있다)’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펼친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 운동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이번 인티파다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비인도적인 군사작전에 반대해 복무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수가 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이스라엘 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스라엘 민주주의 연구소’가 지난 3월 발표한 연례보고에 따르면 무려 43%의 18살 이하 청소년이 점령지에서의 복무나 정착촌 철거 같은 특정 임무에 대한 거부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좌파정당인 야하드당 소속 의원들은 종교 신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특히 인티파다 발발 후 지난 3년간 조직화된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증가 추세에 있다. 이스라엘 최고 엘리트 부대로 알려져 있는 ‘사에레트 마트칼’ 소속 장교 13명이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내에서의 비인도적인 군사작전에 반대해 점령지에서의 복무를 거부한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사에레트 마트칼은 1950년대에 창설되어 1990년대까지 그 존재가 비밀에 감추어진 특수부대로 이스라엘의 전 총리였던 베냐민 네타냐후, 에후드 바락, 현 IDF 참모총장인 모세 아얄론 등 최고 엘리트들을 배출해낸 부대이자 ‘엔테베 작전’ 등 숱한 전설적인 군사작전을 성공시킨 부대였기에 이 부대 소속 장교들의 양심적 병역거부는 이스라엘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예쉬 그불’의 주장에 따르면 11명의 장교를 포함한 76명이 2003년 선택적 병역거부로 복역했으며, 79명의 사병과 18명의 장교가 또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 단체인 ‘오메츠 레사레브(거부하는 용기)’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고등학생 병역거부자의 수는 5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사에레트 마트칼의 경우는 군인으로서 특정 임무를 거부하는 선택적 병역거부의 예다.

    이와 함께 징집 자체를 거부하는 수도 늘고 있다. 징집 자체를 거부하는 대표적 사건이 2001년에 발생한 ‘12학년 편지사건’이다. 12학년은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데 남학생 5명, 여학생 5명이 양심상의 이유와 점령지에서의 군사작전에 반대해 징집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작성한 것이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러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면제 판정 땐 자원봉사 대체복무

    이스라엘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1995년 이들 거부자를 심사하는 양심위원회를 설립했다. 말 그대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인지, 아니면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는지를 심사하는 기관이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이 위원회에 심사를 신청한 150명의 남학생 중 면제 판정을 받은 학생은 6명으로 신청자의 4%에 지나지 않았다. 여학생의 경우에는 해마다 120~180명이 심사를 신청하는데 2002년의 경우 173명이 신청해 118명이 면제받았고 23명은 항소심에서 면제받았다. 80%에 이르는 면제율이다.

    이처럼 남녀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남자와 여자를 심사하는 위원회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자의 경우 국방부 관할 아래 민간인위원회에서 심사하고, 심사결과에 대해 항소할 수 있는 항소위원회가 있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는 군대 내의 군사위원회에서 심사하며 항소위원회가 없다. 두 위원회는 각각 독자적으로 운영돼왔고, 심사 기준도 서로 달랐기에 이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IDF는 지난 3월 두 개의 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했다. 통합된 위원회의 형태는 군사위원회에 민간 전문가인 철학자가 참여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위원회가 군대 내로 들어간 만큼 남자의 면제율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면제율이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며, 실제로 올 들어 벌써 4명의 여성 병역거부자가 처벌받는 상황이 나왔다. 전례가 없는 높은 수치다. 이스라엘에서 징병거부는 최고 3년형에 처해진다.

    양심위원회에서 징집면제 판정을 받지 못하면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형이 확정되면 민간 교도소에서 복역하는데, 일반적으로 1년형을 선고받는다. 징집면제를 받은 경우에는 대체복무를 하는데, 대체복무는 사회 재교육기관, 자원봉사단체, 의료봉사단체, 환경보호단체 등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국가봉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스라엘의 검찰총장인 므나헴 마주즈는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긍정적 현상”이라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더 나아가서 “병역에 대한 거부와 정치적 이유에 따른 시민 불복종은 지난 수십년간 이스라엘의 현실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고 말했다. 검찰총장의 이 같은 발언으로 이스라엘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은 앞으로 더욱 힘을 받게 될 전망이다.

    이스라엘에는 적어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심사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면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돼 있다. 이 모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한 해 평균 700명의 젊은 범법자를 양산하는 한국에서도 이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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