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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풍수|기황후와 제주도 원당사 탑

원나라 황제도 점지한 ‘득남 명당’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원나라 황제도 점지한 ‘득남 명당’

역사적으로 고향에서 천대받던 사람이 타향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된 기(奇)씨가 대표적인 예다. ‘원사(元史)’에는 기황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황후 기씨는 고려 사람이다. 황태자 애유식리달엽(愛猷識理達獵)을 낳았다. 원래 집안은 미천했으나 후에 귀하게 되어 3대가 모두 왕작으로 추봉됐다.” 고려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원나라 황제의 부인이 되고 나중에는 황제의 어머니까지 됐으며, 또 그 덕분으로 친정집 삼대가 왕으로 추존됐으니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원나라 황제도 점지한 ‘득남 명당’

원당사 터에 세워진 불탑사 전경.

기황후는 원나라 말 30년간 원나라 황실에서 주도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 조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더구나 몽고인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는 금기까지 깨뜨리고 몽고제국의 황후가 되었으니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개인의 성공 사례로 이처럼 극적인 경우는 드물 것이다. 어떻게 고려의 가난한 처녀가 원나라 황후가 됐을까? 한 개인의 성공에는 행운이 따라줘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자의 노력도 중요하다. ‘고려판 신데렐라’ 기씨 처녀의 경우에도 여기서 다 설명할 수 없는 인고와 노력이 있었다. 고려 말 기자오(奇子敖)의 딸로 태어난 기씨 처녀는 당시 상국인 원나라에 바쳐진 ‘조공 물품’ 가운데 하나였다. 1333년 8월 원나라로 끌려간 뒤 고려 출신 내시의 도움으로 황제인 순제에게 차를 올리는 일을 맡는다. 그리고 자신의 타고난 미모와 지략을 활용하여 순제의 총애를 받아 제2 황후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만큼 질시와 견제도 많아졌다. 제1 황후한테서 온갖 모욕뿐 아니라 심지어 매질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는다.

기황후는 황실에서 모범적인 언행을 보였고, 자금을 모아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을 꾸준히 넓혀나갔다.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식량을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그러나 이런 선행과 지지세력 확대만으로는 자신의 입지가 확실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권력을 굳건히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황제의 뒤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황후는 풍수가 목적하는 탈신공개천명(奪神工改天命•하늘이 하는 일을 빼앗아 천명을 바꾼다)을 시도한다. 황후가 되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하자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산세를 갖춘 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믿어 천하의 이름난 풍수들을 동원해 찾게 한다. 여기에 고려 풍수사들도 동원됐는데, 마침내 제주도 동북 해변에서 바라던 자리를 찾았다. 기황후는 사신을 보내 오층탑을 쌓게 하고 극진한 기도를 올리게 한다. 이곳이 바로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에 있는 원당사(元堂寺•현재 불탑사) 오층석탑이다. 원당봉이란 산 이름도, 원당사라는 절 이름도 모두 원나라를 뜻한다.

원나라 황제도 점지한 ‘득남 명당’

원당사 터 발굴 현장.



이런 노력 덕분에 1339년 기황후는 원나라 황통을 이을 아들을 낳는다. 그 후 그녀는 원나라가 몽고 내륙으로 쫓겨갈 때까지 30년간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한다. 1368년 명나라 군대가 베이징을 점령하자 기황후는 가족과 함께 몽고 내륙으로 철수한다. 그곳에서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는데 바로 소종황제(昭宗皇帝)다. 드디어 기황후는 황제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후 원당사 오층석탑은 어찌됐을까? 아들을 못 낳은 수많은 고려와 조선의 여인들이 이곳에 가서 기도하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세월의 변고 속에서 원당사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오층석탑은 그대로 남아 있어 아들을 얻기 바라는 이들의 의지처가 되고 있다. 특이하게도 오층석탑은 입지가 조선시대 이후의 터 잡기 방식과 다르다.

원나라 황제도 점지한 ‘득남 명당’

득남을 기원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옛 원당사 오층석탑.

조선 이래 터 잡기가 땅의 형세와 좌향만을 중시하는 반면, 이곳 오층석탑의 위치는 하늘의 방위와 별, 즉 천문을 중시한 흔적이 뚜렷하다. 오층석탑의 좌향이 산세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북극성을 향하는 점도 그 예다. 즉 별을 보고 점을 치거나 별의 기운에 따라 인간 개개인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천문사상(숙명론•宿命論)이 이곳 터 잡기에 반영된 것이다.



주간동아 2004.06.24 440호 (p93~93)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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