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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창 | 영국의 두 얼굴

‘신사의 나라’인가, ‘제국주의 오랑캐’인가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신사의 나라’인가, ‘제국주의 오랑캐’인가

‘신사의 나라’인가,  ‘제국주의 오랑캐’인가
몇 년 전 아키히토 일본 천황이 영국을 방문했다가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고통당한 영국 군인과 민간인들의 항의시위에 부닥친 것이다. 영국재향군인회 회원들은 일왕 행렬이 지나갈 때 ‘보기 대령 행진곡’을 휘파람으로 불러대며 시위를 벌였다. 이 행진곡은 바로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주제곡이다.

이 영화에서 영국군은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늠름함과 자존심을 잃지 않아 야만적인 일본군과 대조를 이룬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영국, 또 영국군의 이미지는 이 영화에 묘사된 영국군 포로의 그것과 겹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군 포로에 대한 영국군의 가혹행위 장면을 담은 사진은 이라크 전쟁의 성격과 함께 영국에 대해 품고 있던 이 같은 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람의 얼굴에 오줌을 갈겨대는 영국 병사의 야비한 얼굴 표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영국인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알아왔던 ‘신사의 나라’다운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영국군이 이라크에 진주하면서 “미군과 다른 처신과 태도로 이라크인의 마음을 살 것”이라고 했다는데,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걸 드러내준 셈이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가 어느 책에 이런 경험을 털어놓았다. 수업 중에 ‘England’의 한자 표기인 영길리국(英吉利國)의 준말이 영국이라는 말을 가르치면서 이 말을 직역하면 ‘영웅의 나라’로 풀이할 수 있다고 농담을 하자 학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학생들은 “약탈을 일삼던 오랑캐들을 이렇게 좋게 불러주다니 극동인의 포용력이 대단하다”고 비아냥거렸다는 것이다.

‘신사의 나라’와 ‘제국주의 오랑캐’. 이 두 가지의 서로 반대되는 면모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정확히 말하자면 기형적인 쌍둥이, 같은 모태에서 태어난 자웅동체라고 하는 게 맞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는 영국 신사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깍듯한 예의범절, 절제된 균형감각과 합리성, 약자를 배려하는 여유와 휴머니즘. 포그의 이미지는 다른 영화나 책에서 흔히 만나는, 인공적으로 꾸민 이른바 ‘영국식 정원’에서 한가로이 홍차를 마시는 영국인의 일상과 겹쳐 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그림은 어디까지나 그들 안에서 머무를 때만 가능하다. 그들이 눈을 바깥으로 돌릴 때 거기에는 이민족의 희생을 강요하는 가혹한 제국주의적 수탈의 역사가 있다. 안에서의 신사도가 밖으로 향할 때는 야수의 발톱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유럽인이 원주민을 멸종시킨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호주 태즈메이니아 섬 주민들에 대한 계획적 섬멸이있다. 양을 칠 공간이 필요하다 해서 원주민을 없애기로 한 영국계 이주민들은 붙잡힌 원주민들을 생화장하는 등 끔찍한 방법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1770년 영국의 해군 대령이었던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발견’된 이후 호주의 역사는 원주민(애버리진) 학살과 강제이주의 연속이었다. 애초 50개 부족에 100만명 정도였던 애버리진이 지금은 30만명에 그치는 현실이 그들 수난의 역사를 말해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호주 육상의 영웅 캐시 프리먼이 왼쪽 어깨에 새겨넣었던 ‘Because I am free’라는 문신은 조상들의 고통에 대한 절규였던 셈이다.

불과 몇 십년 전인 1970년대 말까지도 영국 이주민의 후예인 호주 정부는 원주민 강제 이산정책을 실시했다. 원주민들을 백인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한 이 정책 때문에 7만여명의 어린이들이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몇 년 전 국내에 소개된 영화 ‘토끼 울타리’(사진)는 이때 강제로 부모 곁을 떠나야 했던 세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국 이주민들에게 애버리진이나 뉴질랜드의 마오리 같은 원주민들은 동물이나 다름없다. 가령 여성주의 시각의 영화 ‘피아노’는 19세기 말 벙어리 여인 아다가 오지(뉴질랜드)로 시집을 가서 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눈을 뜬다는 이야기지만 그들 인간끼리의 얘기 속에 원주민들은 단지 ‘소품’으로 등장할 뿐이다.

왜곡된 중동 역사의 주범인 영국군이 100년 만에 다시 찾은 이라크 땅에서 저지른 ‘만행’은 그런 탓에 지난 역사 속에서 너무도 익숙했던 풍경의 재연일 뿐이다.



주간동아 435호 (p97~97)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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