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0

2003.11.20

오지서 만난 ‘데릴사위’와 빅 마마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3-11-13 13:3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오지서 만난 ‘데릴사위’와 빅 마마

    아시아 오지의 모계사회를 담은 다큐사진 전시회를 여는 백지순씨. 오른쪽은 중국 윈난성 루구호씨에서의 작가.

    전 세계 563개 민족 중 여성을 중심으로 한 모계사회를 이룬 민족이 84개에 이른다고 한다. 아직도 호주제가 남아 있는 우리 사회의 상식을 뛰어넘는 많은 숫자다. 그러나 이제 모계사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이 서양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아시아의 오지에 숨어 있듯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찾아 아시아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모계사회의 ‘오늘’을 카메라에 담은 당찬 사진작가가 있다. 11월12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룩스에서 ‘아시아의 모계사회’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여는 여성 사진작가 백지순씨(37)다.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은 많았지만, 이론적 관점보다는 ‘모계사회가 존재한다’는 말에 본능적으로 귀가 번쩍 뜨여 시작한 일이었어요. 처음 그들을 찾아 사진을 찍은 때가 1993년이니 벌써 10년이 됐네요.”

    18일까지 갤러리룩스서 전시회

    백씨는 주로 아시아 소수민족들의 문화와 풍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중국과 인도네시아, 인도와 베트남의 일부 지역에 모계사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지의 대학과 연구기관 등에서 사전조사를 마치면 백씨는 마을로 들어가 운전기사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동네 잔치, 결혼식, 성인식 등이 있으면 무조건 데려다 달라는 것이 백씨의 부탁이었다. 특히 결혼식은 모계사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의식이어서 때론 결혼식이 열릴 때까지 마을에 기약없이 머물기도 했다.

    “베트남의 소수민족인 에데족은 결혼식을 ‘남자를 사오는 잔치’라고 부릅니다. 신부가 지참금을 내고 신랑을 데려와요. 재미있는 건 결혼식을 지켜보던 동네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나누던 이야기예요. 남자들이 신랑의 본가와 처가가 가까워 부럽다며 어떤 사람은 아내가 허락하지 않아서 자기 집에 못 간다, 돈이 없어 못 간다, 처가와 본가 사이가 나빠 못 간다고 푸념하는 겁니다. 부계사회와 정반대지요.”



    또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사는 미낭까바우족은 이미 상당히 문명화한 상태여서 젊은이들은 도시에 있는 직장에 다니지만 결혼은 강력한 모계사회의 전통 하에서 이뤄진다. 백씨가 만난 한 신랑과 신부의 경우, 신부는 잘나가는 공무원이었지만 신랑은 호텔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신부가 신랑을 데려오는 결혼식 날 여자 쪽 친척들만 참석하는 것이나, 여자 아이들이 어엿한 자기 방을 갖는 데 비해 남자 아이들은 주로 거실에 모여 생활한다는 것, 여자조카가 외삼촌을 부양하는 것 등도 모계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오지서 만난 ‘데릴사위’와 빅 마마

    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미낭까바우족의 결혼식에는 여자 친척만 참석한다. ② 베트남의 에데족의 결혼식. 왼쪽 끝이 신랑과 신부이고 나머지는 신부의 가족이다.아시아 오지의 모계사회를 담은 다큐사진 전시회를 여는 백지순씨.오른쪽은 중국 윈난성 루구호에서의 작가. ③ 중국의 모쒀족은 재산과 성이 모두 어머니에게서 딸로 상속되는 모계사회다. ④ 모쒀족은 ‘아샤혼’ 풍습에 따라 남자가 저녁때 여자의 집에 왔다가 동트기 전에 돌아간다.

    특히 중국 윈난성의 해발 2700m 산악지역에 고립된 채 살고 있는 모쒀족은 결혼제도 없이 ‘프리섹스’를 통해 자손을 이어간다. 남자는 여자가 문을 열어놓는 동안만 출입이 허락된다. 그래서 성격이 좋은 여자들은 평생 수십 명의 남자와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이곳 남자들은 소금을 구하기 위해 한두 달씩 마을을 떠나 있어야 해요. 여자들은 집을 갖고, 농사를 지으며, 아이를 낳아 키우지요. 그러니 모계사회가 이들의 삶에 가장 잘 맞는 방식인 거지요. 원시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만, 여자들이 보육 공간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혼과 독신이 많아지는 미래 사회의 가족 형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원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백씨는 기계-카메라-를 통해 ‘재능의 결핍’을 보완하리라 결심하고 연세대 재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통해 사진에 입문했다. 다큐멘터리 사진계의 대가인 김수남 선생을 6개월 동안 졸라 겨우 ‘조수’가 될 수 있었고, 8년 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배웠다. 학교에서 배우는 방법도 있었지만 “다큐멘터리는 무엇보다 현장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믿는 백씨는 어디라도 함께 갈 수 있는 신랑감을 찾을 때까지 결혼을 미뤄두었다며 활짝 웃었다. (전시 문의 02-720-8488)



    문화광장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