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2

2003.09.25

지친 그대, 녹색 악어 제이크 만나라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9-18 16: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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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친 그대, 녹색 악어 제이크 만나라
    작가 조경란씨(34·사진)가 조금은 특별한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 등이 우툴두툴하고 몸이 길쭉하며 눈이 무섭게 생겼다는 것 외에 악어에 대해 뭐 그리 할 말이 있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짚었다. 더욱이 도쿄에서 온 ‘제이크’라는 녹색 악어에 대해서라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에 가서 초밥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했어요…. 어찌어찌하여 하와이까지 왔는데 식당일이란 게 쓸고 닦고 쓸고 닦고…. 그날 아침에도 물을 끓이려고 불을 붙이는데 제이크를 보았어요. 뭐, 식당일이 그리 질리지는 않아요.”(28세·초밥 조리사)

    “일광욕이나 할까 하고 벗은 채로 베란다로 가려던 참이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요. 거기에 제이크가 나와 있었어요. 병원에 실려온 다섯 살 난 아이, 이미 창자가 삐져 나와 있었는데도 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죠. 이미 죽은 가족들을 찾으면서…. 이 일, 계속해야 하겠죠?”(32세·민간 원조단체 참가 의사)

    제이크는 가상의 악어다. 2001년 일본 도쿄TV에서 25회에 걸쳐 방영한 애니메이션 ‘전설의 악어 제이크’의 주인공 이름이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은 삶의 중요한 고비에서 제이크를 만난다. 초밥 조리사나 원조단체의 의사처럼.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꿈꿀 때, 내면의 힘이 불러내는 상징적인 존재가 바로 제이크다. 직업에 대한 회의, 결혼과 이혼을 둘러싼 문제들, 가까운 미래의 진로 등을 둘러싸고 고민하던 이들은 제이크라는 존재를 만나며 변화한다.



    작가 조씨도 그런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우연히 제이크란 존재를 알게 된다. ‘여행도 시시하고 무엇에도 마음이 떨리거나 흔들리지 않던’ 그에게 한 출판편집자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전설의 악어 제이크’를 선물한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조씨는 원작의 에피소드 중 일부와 준코 야마쿠사의 일러스트에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덧붙여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를 썼다.

    조씨는 소설집 ‘불란서 안경원’ ‘코끼리를 찾아서’, 장편소설 ‘가족의 기원’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등을 펴냈고,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2년)과 ‘현대문학상’(2003년)을 받은 주목받는 작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도 그의 삶 전반을 에워싸고 있는 ‘마음의 감기’(우울증)를 걷어내지는 못했다. 제이크를 알게 된 뒤 작가는 용기를 내 우울증의 근원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슬픈 가족사와 우울한 일상.

    그의 첫번째 할머니는 가족들이 다 모인 생신날 손수 복어국을 끓여 드시고 자살했다. 이혼한 고모는 애인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그 뒤 작가는 오랫동안 헛것을 보았고,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날마다 조금씩 글을 썼다. 막내삼촌은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며 말라갔고, 평소 다정하고 숫기 없는 아버지는 술에만 취하면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절망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작가는 일본 소설에서 발견한 ‘우리 오빠가 던지는 볼은 모두 데드볼 같은 것이었다’는 문장에서 ‘오빠’를 ‘아빠’로 바꿔본다. 장편소설을 쓰느라 모텔방을 전전할 때 술 취한 아버지를 피해 찾아온 어머니와 동생은 함께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작가는 비틀즈의 음악을 떠올리며 희망을 잃지 않는다. ‘비가 내려도 난 괜찮아요. 해가 비치면 날씨가 좋은 거죠.’ 그는 이렇게 음습한, 밝히기 힘든 자신의 우울을 햇볕 아래 꺼내놓고 말려버리고 싶었던 걸까.

    제이크를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들은 싱크대, 베란다, 변기, 주머니 속, 지하철 선반이나 책장 사이 같은 데서 우연히 제이크와 마주친다. 아프리카나 동물원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악어가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제이크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커다란 위로를 받고 자신을 둘러싼 크고 작은 문제들의 핵심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제이크의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제이크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가장 친밀한 존재가 됐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는 목격담이 더 많이 들려오고 그로 인해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제이크가 있다. 견디는 것이 치료이고 기다리는 것이 희망이다.”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조경란 지음/ 준코 야마쿠사 그림/ 마음산책 펴냄/ 176쪽/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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