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0

2003.04.17

일본인이 팔고 한국인이 산다?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3-04-10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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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이 팔고 한국인이 산다?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9억원에 낙찰된 백제 금동좌불상

    3월24일,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열린 ‘한일 경매전(Korean and Japanese Art)’은 ‘신기록 대행진’이나 다름없었다. 이날 입찰된 한국 작품 41점 중 7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금동좌불상이 157만5500달러(약 19억원)에, 한국 현대회화인 박수근의 ‘한일(閑日·10호)’이 112만7500달러(약 13억5000만원)에 팔린 것. 이는 박수근의 ‘악(樂)’이 세운 한국 현대회화 경매사상 최고가(2002년 11월 런던 소더비 경매)를 경신한 기록이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의 술병인 분청 장군이 6억8000만원에, 김환기의 유화 ‘백자 항아리’(40호)가 3억9000만원에 낙찰되었다. 이날 낙찰된 한국 미술품의 총 경매가는 500만 달러에 달했다. 국내의 최대 미술품 경매회사인 서울옥션의 한 해 낙찰가 총액이 70만~80만 달러 수준인 것을 고려해보면, 크리스티 경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미술품들을 거액을 주고 사들이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이 미술품들이 어떠한 경로로 뉴욕의 경매시장에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일까.

    보통 경매회사는 낙찰자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크리스티에서 백제 금동좌불상을 사들인 장본인은 아시아 미술품 전문 딜러인 존 에스케나지로 밝혀졌다. 백제 금동좌불상은 대만의 개인 소장가가 10여년 전부터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국내 고미술 관계자들에게도 낯익은 유물.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 흘러 들어간 것 같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불상·박수근 회화 등 고가에 낙찰



    일본인이 팔고 한국인이 산다?

    크리스티의 경매 광경. 소더비와 함께 양대 경매회사로 꼽히는 크리스티는 매년 2회씩 한국 미술품을 경매한다.

    비단 이 금동좌불상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경매되는 고미술품들은 대부분 임진왜란과 구한말,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과 장진아씨는 “문화재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시대에 ‘골동품’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들이 상당수다. 이들이 다시 일본을 거쳐 미국 경매시장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크리스티 등에서 경매되는 한국 고미술품 중 60~70%가 일본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장기불황으로 인해 한국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는 일본 소장가들의 수가 요즘 들어 부쩍 느는 추세다.

    고미술품에 비해 박수근의 ‘한일’이 미국으로 간 경위는 명확하다. 박수근은 한국전쟁 중에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렸다. 이 당시의 인연으로 많은 미군과 군속들이 박수근의 작품을 사 갔다. 10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박수근의 회화들은 당시 미군의 한 달 월급보다 적은 100달러 미만 가격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12만 달러에 ‘한일’을 사들인 이는 누구일까? 미술 관계자들은 “단언할 수는 없지만 99%는 한국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큰 경매회사들이 한국 미술품을 경매하면 그 주의 뉴욕행 비행기는 티켓을 구하기가 힘들 지경이라는 후문도 있다. 한 박물관 관계자는 “경매에 응찰하는 사람들의 신원은 경매회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직접 경매장에 나타나지 않고 전화나 대리인을 통해 응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매 전에 이루어지는 프리뷰 전시에 가보면 한국인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수근 작품의 경우 지금까지 20여점이 해외 경매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일본인이 팔고 한국인이 산다?

    70회 서울옥션 경매에 나온 고려시대의 불화 수월관음도(부분)과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현대회화 사상 최고가인 13억 5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의 ‘한일’(위 부터)

    사실 경매는 해외로 유출된 한국 문화재를 환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가치 있는 유물이 해외 경매장에 나오면 사립박물관은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등도 경매에 참여한다. 최응천 국립춘천박물관장은 “워낙 가격대가 높아서 응찰이 쉽지는 않다”고 말한다. “국립박물관의 경우는 1년 예산이 한정돼 있는 데다 유물구입비를 전부 경매에 쓸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경매는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 박물관측이 준비한 예산 이상으로 호가가 오르는 경우가 많아서 좋은 유물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는 경우도 있죠.”

    뉴욕 등 해외 경매에서 팔리는 한국 고미술품들은 한국 딜러들 간의 경쟁으로 가격이 지나치게 오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이없는 저가에 팔려 나가는 경우도 있다. 크리스티에서 경매된 백제 금동좌불상의 경우도 19억원이라는 낙찰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 인사동 고미술상들을 중심으로 이 불상이 백제 불상이라는 확증이 없다는 말이 돌면서 한국 딜러들이 응찰을 주저했다는 것. 한 고미술상 관계자는 “아마 백제 불상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한국 딜러들이 19억원의 서너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응찰했을 것이다”고 귀띔했다. 반면 지난해 3월 열렸던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예상가 30만 달러였던 고려 상감청자가 1만 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미술품 해외 경매에 비해 국내의 고미술 경매는 여전히 침체돼 있다. 서울옥션의 이학준 상무는 “현대미술에 비해 고미술은 좋은 작품이 국내 경매에 나오는 경우가 드물어 그만큼 거래도 잘 되지 않는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일본의 개인 소장가들은 아직 한국 경매회사보다는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해외 경매회사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 “소장가들은 신중하고 보수적이기 때문에 경매회사에 대해 믿음이 없으면 좀처럼 소장품을 내놓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 경매회사들은 일본에 소장된 문화재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만, 소장가들과 신뢰를 쌓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실제로 4월10일에 열리는 70회 서울옥션 경매에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가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내 경매시장에 고려 불화가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옥션측은 이 수월관음도 역시 일본의 개인 소장가가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전했다.

    문화재에는 ‘정가’가 없기 때문에 수십억원에 낙찰되는 한국 문화재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뉴욕의 경매시장에 등장하는 한국 고미술품들 중 상당수가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문화재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는 일본 천리대에 소장된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 등 우리에게 알려진 해외소장 문화재말고도 그만큼 해외에 유출된 국보급 유물이 많다는 간접적 증거인 셈이다.





    문화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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